치유와 회복으로 자라는 교회

주일공동예배

2025년 3월 23일 공동예배 설교
2025-03-24 10:19:05
김창신
조회수   24

*말씀봉독 : 창세기 15장 12-21절

*말씀선포 : 침묵하며 외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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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장로 2025-04-02 05:30:36
성경 말씀: 창세기 15장 12-21절 설교 제목: 침묵하며 외쳐라! (이건희 목사) 오늘 우리는 사순절 가운데 세 번째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고난받고 죽으신 주님을 기억하며, 부활의 기쁨을 소망하며 준비하고 기도하며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기도의 침묵과 부활의 희망을 품는 시간입니다. 지난주 설교에서 아브라함과 욥을 비교하며 말씀을 나누었는데, 오늘도 그 내용의 일부가 반복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인물입니다. 전 세계 종교 인구를 살펴보면 기독교 인구가 약 25-26억 명으로 가장 많고, 이슬람교 인구가 약 20억 명으로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이 두 종교 인구를 합치면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넘는 약 45-46억 명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현재 아브라함의 무덤은 이스라엘 헤브론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늘 창세기 15장의 배경 또한 헤브론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가 죽은 후 막벨라 굴을 매입하여 가족묘를 조성하였고, 그곳에는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의 묘가 있습니다. 헤브론은 유대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며, 현재에도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공존하는 지역입니다. 서로 다른 입구를 사용하지만, 아브라함의 묘는 함께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은 양쪽 모두에게 믿음의 조상이자 전 세계 인구의 믿음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난주 설교에서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고 모리아 산으로 가는 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반면 욥은 엄청난 고난 속에서 친구들과 논쟁하고 하나님께 항거하며 많은 말을 했습니다. 이처럼 고통과 고난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는 매우 달랐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침묵했고, 욥은 우리와 비슷한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혈액 확대 동영상 시청) 우리의 혈액 속에는 백혈구의 일종인 호중구가 존재하며, 이들은 몸속에 침입한 유해한 물질을 제거하는 역할을 합니다. 호중구의 숫자가 적절하게 유지되는 것이 중요하며, 갑자기 증가하는 것은 몸에 이상이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암 조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우리 성도들 가운데 암으로 고통받는 분들이 많은데, 제가 암에 대해 말씀드리는 이유는 침묵과 암 조직 사이에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암(癌)'이라는 한자를 살펴보면 '병들어 기댈 역(녁)' 자와 '바위 암(岩)' 자가 합쳐진 글자입니다. '바위 암' 자는 입 구(口) 세 개 밑에 뫼 산(山) 자가 붙어 있는데, 이는 공기, 물, 음식 세 가지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즉, 우리가 제대로 된 공기, 물,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여 몸에 노폐물이 쌓여 세포가 굳어지고 암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 '암' 자를 다르게 해석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주변 사람들이 떠나가 대화할 상대가 없어지는 상황을 빗대어, 할 말이 태산처럼 많지만 말할 기회가 없어 벽에 가로막힌 듯한 형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화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침묵을 지켰습니다. 사실 기독교의 수련 과정에도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수도사나 성직자들은 대침묵으로 시작하여 침묵의 삶을 살아갑니다. 카르투시오회와 같은 수도회는 기도 시간과 외부 대화 시간을 제외하고는 수도원 내에서 완전한 침묵을 지킵니다. 우리는 오늘 하루에도 수많은 말을 하며 살아갑니다. 말의 풍년 시대이지만, 말로 인한 다툼 또한 끊이지 않습니다. 악한 말도 너무 많이 들립니다. '구화지문(口禍之門)'이라는 말처럼 입은 재앙을 불러오는 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규언영색(巧言令色)'하며 교묘하고 가식적인 말을 하는 경우가 많은 현대인의 삶을 반영하는 듯합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은 말이 없었습니다. 이 점이 욥과 비교되는 부분입니다. 물론 욥도 처음부터 말이 많았던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욥기의 대부분은 그가 쏟아낸 많은 말로 채워져 있습니다. 나중에야 하나님을 뵙고 회개하며 이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았지만, 그 과정 대부분은 많은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러 가는 두렵고 떨리는 길에서 하나님을 믿었기에 침묵할 수 있었습니다. 이삭을 요구하신 하나님이시지만, 결코 이삭을 요구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은 믿었기 때문에 침묵할 수 있었습니다. 되돌려 받을 것이라는 믿음, 부조리한 것을 믿는 믿음이 있었기에 거리낌 없이 이삭을 바치려 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은 체념하고 욥과 같은 모습을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으면서 침묵했던 아브라함에 대해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삭을 바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일어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부조리한 것에 힘을 빌려 새로운 이삭을 내게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아브라함은 침묵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은 말 많은 욥과는 다릅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힘, 부조리한 것을 믿는 믿음의 능력을 붙잡고 아브라함은 잠시도 희망을 놓치지 않았고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침묵했지만 인간의 도리와 윤리를 버리지 않았고 신앙을 지킨 인물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침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무엇을 근거로 이 무지막지한 상황 속에서도 침묵하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이 그 이유에 대한 답의 근거가 됩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러 가면서도 침묵할 수 있었던 이유, 그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과 그와의 특별한 만남에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15장 뒷부분이지만, 1절부터 읽어보면 이삭이 태어나기 전, 헤브론에서 아브라함이 아직 아브람으로 불릴 때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람은 '높은 아버지' 또는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이었고,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의미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습니다. 열국의 아버지가 되기 전 헤브론에서 있었던 일이 오늘 15장의 내용입니다. 그때 아브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특별한 체험을 했습니다. 창세기 15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환상 중에 임했다는 것은 평범한 경험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흔들릴 만한 큰 깨달음의 체험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계시를 잘못 받거나 깨달음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면 사이비 교주가 되거나 망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방향성을 가진 하나님의 계시라면 구약의 선지자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하나님과의 관계가 밀접했기에 늘 동행했으며, 오늘 창세기 15장과 같은 특별한 계시,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아브람이 두려워했다는 의미입니다. 고향을 떠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중 가장 큰 두려움은 자식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식이 없으면 미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났지만, 상속자가 없다면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하인 중 신실한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을 생각을 했습니다. 이는 아브람으로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날 아들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말로만 그치신 것이 아니라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하늘의 별을 보게 하셨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쏟아지는 광경을 아브람은 목격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엘리에셀을 생각하는 세속적인 생각에 빠져 있지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며, 그의 몸에서 태어날 상속자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성경은 기록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자손에 대한 약속 이전에,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겠다는 약속 이전에 아브람의 믿음은 어떠했을까요? 믿음이 있었지만, 온전한 믿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이신칭의의 개념이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같으면 자식을 주시겠다는 약속, 셀 수 없이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에 집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느냐 아니냐에 매몰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아브람은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진다는 사실 자체도 믿었지만, 그것을 넘어선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이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 차원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관심의 중심은 여호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브람은 자신에게 미래에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보다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러한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 기독교 역사 속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 바로 그 점입니다. 현실의 삶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일어나고, 나쁜 일도 벌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지고 살 때, 앞으로 돈이 많아지고 자녀가 많아지고 권력이 생기는 것도 좋겠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려면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체험해야만 했습니다. 바로 아브람의 이 하나님 체험이 15장 1절과 4절에 기록된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어로 '디바르 야훼', 여호와의 말씀이 아브람이 하나님을 체험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12절에 보니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깊은 잠에 빠진 아브람에게 큰 흑암과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새번역 성경은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이런 경험은 하고 싶지 않죠. 가능하면 밝고 기쁘고 즐거운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성경은 철저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첫걸음이 무엇이냐? 흑암과 두려움과 깊은 어둠과 공포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유한한 인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무한하신 분, 전능하신 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체험한다고 할 때, 처음부터 즐겁고 행복하게 만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깊은 두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학에서는 이것을 '누미노제'라고 부릅니다. 적절하게 번역하면 거룩한 두려움, 구별되는 분을 만나게 되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우면서도 기쁜, 아주 특별하고 낯선 체험입니다. 이러한 체험이 없는 하나님 체험은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천 년 기독교 역사도 마찬가지고, 유대교 신앙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큰 흑암과 두려움에 휩싸였을 때 다시 특별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연기가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더라." 이 표현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만날 때 준비한 제물을 불태우는 번제의 장면입니다. 암소, 암염소,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 새끼, 암소를 바쳤다는 것은 아브람이 큰 부자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번제로 바쳐지는 제물들, 불타는 연기가 나고 화로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그러면서 18절에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두려움 속에 있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그 아브람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의 핵심은 가나안 땅을 아브람의 자손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인데, 앞으로 엘리에셀이 아닌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며, 그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가나안 땅은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정도의 크기입니다. 그래도 그 땅의 일부라도 받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땅 부자가 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을 아브람의 자손들에게 주겠다는 이 약속을 단순히 부자가 되게 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 너와 네 자손들의 생명의 근본이고 토대가 앞으로도 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아브람이 지금의 팔레스타인 땅, 가나안 땅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큰 흑암과 두려움 속에서 이제는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명이 계속 이어지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겠다고 하시니, 아브람이 믿은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토대가 되신다는 것을 아브람은 확실하게 믿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순절을 보내면서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바라보면 이는 흑암입니다. 엄청난 깊은 흑암과 고통의 흔적입니다. 두려움입니다. 실감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일입니다. 이 끔찍한 공포의 순간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는 기억하고 신앙 고백하지 않습니까? 바로 아브라함이 그 깊은 공포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과 하늘의 별을 보고 하나님을 믿고 생명의 토대와 근원으로 믿었으며, 그 믿음을 하나님이 인정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다시 욥의 이야기를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욥을 그렇게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욥은 침묵하지 않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울부짖고 외치고 저항하고 대들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훨씬 더 인간답지 않을까요? 오히려 그 모습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전통적인 입장과는 다른 흥미로운 해석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해방신학을 시작한 남미의 신부이자 신학자인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방법 또는 방식으로 첫 단계가 침묵의 단계이고 둘째 단계가 말하는 것이다." 전도자가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입을 열 때가 있으면 입을 다물 때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도 그런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외침은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특히 불의하게 죄 없이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불평하고 외치고 저항할 권리가 있습니다. 구티에레즈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외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럴 때는 입 다물지 말고 침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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