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와 가톨릭 순교의 역사
청주제일교회는 다른 어떤 교회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청주제일교회가 순교의 터 위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현재 청주제일교회의 자리는 조선시대 군대가 주둔하던 충청도의 다섯 개의 진영 중에 중영이 있던 곳이다.
1800년의 신유박해부터 1866년의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고문을 받고
옥에 갇혔다가 처형된 가톨릭 순교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교회이다.
병인박해(丙寅迫害)는 조선에서 자행된 천주교 박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박해이다.
1866년 병인년에 시작되어 병인박해로 부르며 그 규모와 가혹함과 희생자 수에 있어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 박해였다.
현재 교회의 자리는 1866년 병인박해 이후 가톨릭 신자들의 체포를 주도한 관청 진영이다.
당시 순교를 당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복자 오반지 바오로가 있으며
김준기 안드레아, 전 야고보, 최용운 암브로시오, 여 요한, 최 조이 부부도 이 곳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이토록 청주제일교회는 순교자들의 피가 씨앗이 되어 자라고 피어난 교회이다.
복자 오반지 바오르
(1813 ~ 1866년)

충북 선교의 아버지 ‘민노아 선교사’
1866년 병인박해 때 현 청주제일교회 부지에 있던 옥사에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심문을 받고 배교를 요구받았다고 한다.
그 때 그들은 이 요구를 거부하면서 “내일은 꽃이 필거야.”라고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이 해 1866년에 충북 선교의 아버지 민노아(Frederick Scheiblin Miller, 1866~1937) 선교사가 미국에서 태어났고
1904년 현 제일교회의 터에 청주읍교회를 세움으로써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는 단순히 우연이라기보다 청주 땅에 복음의 씨앗을 내딛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볼 수 있다.
충북 사람들은 민노아 선교사를 충북 선교의 아버지라 부른다.
1892년 11월 15일 부인 안나 리네이크와 함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한국 땅에 와서
1902년부터 청주에서 활동하면서 경기남부와 중부권 복음화를 위해 그 젊음과 온 생애를 바쳐 헌신하였다.
청주선교부를 개설하여 운영하고, 청주제일교회를 비롯하여 여러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청남학교 등을 세워충북 교육의 선구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또한 많은 전도지와 소책자를 제작하여 배포하면서 문서선교에 힘을 썼다.
민노아 선교사는 문학과 음악에 재능이 있었기에 찬송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는데
그 때 많은 찬송가를 번역하기도 하고 작사하기도 했다.
그가 지은 찬송들은 100년 동안 변함없이 교회에서 부르고 있는데 그 찬송가는 다음과 같다.
‘예수님은 누구신가?’(96장), ‘주의 말씀 듣고서’(204장), ‘맘 가난한 사람’(427장) ‘예수 영광 버리사’(451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588장)
특별히 찬송가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는 민노아 선교사의 굳은 신앙인의 결의가 느껴지는 찬송가이다.
결혼 후 6년 동안 애타게 원했던 아들을 8개월만에 잃고, 어렵게 얻은 둘째 아들 역시 태어나자마자 떠나보내고
그 후 1년 뒤에 부인마저 잃은 절망적 상황 속에서 탄생한 찬송가가 96장이다.
당시 민노아 선교사에게
“예수가 누구라고 조선까지 와서 고생인가. 차라리 미국으로 돌아가지”라고 수근거렸던 조선인들에게 찬송가로 답을 했는데
그 찬송가가 너무나 잘 알려진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이다.
일생을 충북 선교에 헌신한 민노아 선교사는 1937년 10월 6일 71세의 나이로 갑자기 하늘나라로 갔다.
그의 유해는 현재 일신학원 구내에 안장되어 있으며,
그의 선교기념비 비문에 새겨진 “주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성경 말씀은
오늘 날 우리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민노아 선교사
(Miller, Frederich S, 1866~1937)

청주제일교회 설립
청주제일교회는 1904년에 청주읍 교회로 세워졌다.
1900년 말부터 북장로회의 민노아 목사는 장로교의 손길이 아직 미치지 않은 충청도(忠淸道) 지방에 선교의 뜻을 두고 보조자
김흥경(金興京)조사와 함께 청주지역을 돌며 전도하여 김원배(金源培), 방흥근(方興根), 이영균(李英均), 김재호(金在皓), 이범준(李範俊) 등과 같은 유망한 청년들이 처음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고, 이들 중심으로 1904년 남문밖에 여섯 개의 방을 가진 커다란 초가집 한 채를 마련해
김흥경의 처소 겸 예배당으로 사용하면서 전도한 이들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열었다.
교회가 정치·사회적 변화를 요구하는 젊은층에게 새로운 가치와 활동의 공간을 제공하였으므로,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의 감화를 받아 교회에 나왔고, 사회의 변화와 구국을 갈망하던 젊은 청년들도 열심히 교회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교회 설립 1년 만에 교인이 50여명을 넘을 정도로 부흥하였다.
교인의 증가로 이 초가집으로는 더 감당할 수가 없어 1905년에 새로운 부지를 물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부지를 매입할 만한 자금이 문제였다.
마침 교회 설립자의 한 사람인 김원배가 임종 유언으로 교회에 기부금 100원을 헌납하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온 교인들이 교회건축을 위한 헌금 운동을 전개하여,
마침내 새로운 교회부지를 매입하고, 거기에 교회를 크게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그곳이 현재 청주제일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남문로 1 가 154번지 일대의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