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사랑을 나누는 교회

수요예배

2024년 11월 6일 수요예배 설교
2024-11-08 10:27:26
이민일
조회수   26
  • 말씀봉독 : 빌립보서 2장 14-18절
  • 말씀 : 나와 함께 기뻐하라! ⑤

댓글

김성회장로 2024-11-19 05:11:10
2024.11.6 수요예배 성경말씀: 빌립보서 2:14-18 설교: 나와 함께 기뻐하라!(이건희 목사) (설교 요약) 1. 원망과 시비 없이 1-1. 희생 제사의 재물 - 바울이 희생 제사의 재물이 되어도 기쁘게 받아들임을 언급함 - 희생 제사는 목숨을 드리는 비장한 일로, 생명을 바치는 일이라 비유함 - 구약성경에서 희생 제사는 하나님의 용서를 얻기 위한 제사로, 죄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임 - 대속죄일 희생 제사는 아사셀의 염소를 광야로 내보내 죄를 대신 짊어지고 광야로 내보내는 것임 - 아사셀의 염소는 영적인 존재나 귀신으로 해석되기도 함 1-2. 희생 제사의 의의 - 대제사장은 수많은 제사장들 중 하나로, 하나의 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희생 제사를 드림 - 대제사장은 희생 제사를 통해 백성들의 죄를 속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얻게 함 - 아사셀의 염소 제사는 하나의 영적인 존재가 광야로 내보내진 경우를 의미함 - 희생 제사의 재물은 죄를 대신 짊어지고 광야로 내보내는 것을 의미함 - (중요) 희생 제사는 하나님의 용서를 얻기 위한 수단이었음 1-3. 기쁨과 기쁨 - 바울은 자신의 희생 제사를 통해 빌립보 교회를 기쁘게 받아들임 - 바울은 자신의 희생 제사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며, 이를 통해 믿음을 위한 희생을 했다고 고백함 - 바울은 자기 자신이 희생 제사의 재물이 되어도 기쁘게 받아들임을 언급함 - 바울은 믿음을 위한 희생 제사를 강조하며, 희생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기쁨을 얻고자 함 - 바울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 빌립보 교회를 기쁘게 받아들이고자 함을 밝힘 2. 희생의 의미 2-1. 제사장의 희생 - 성전에서 제사장이 짐승을 잡고 피를 뿌리는 일을 함 - 유대교 제사장도 비슷한 일을 함 - 단번에 짐승을 죽여 고통을 줄이는 과정은 매우 끔찍함 - 예수는 짐승을 사고 팔며 죽음을 맞음 - 예수를 믿는 우리는 예수의 피로 사죄하고 구원받음 2-2. 구약성경의 희생 - 구약성경의 제사 행위는 죄를 대신하는 제물이 필요했음 -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 감당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음 - 희생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과 같음 - 우리는 예배를 통해 희생 제사를 이행함 -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한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임 2-3. 기독교의 역사 -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피를 거름으로 성장한 신앙임 - 가톨릭은 넓은 면적의 성지를 개발했으나, 현재는 3천 평 규모로 유지됨 - 기독교는 순교의 피를 거름으로 삼아 성장했고, 지금도 희생에 의한 믿음을 근거로 함 - 우리는 자기 희생, 세상의 삶을 부정하는 희생을 정신으로 받아들임 - (중요)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봄 3. 기독교 신앙의 본질 3-1. 삶의 자수심과 희생 - 기독교 신앙은 금욕주의적인 삶과 세상의 삶을 포기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기희생을 포함함 - 예수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동시에 인간의 삶을 부정하라고 하지 않음 - 세상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금욕과 경건의식에서 벗어난 것이 삶의 본질임 - 바르세인들은 먹고 마시기를 좋아하고, 죄인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자들로 여겨짐 - 기독교는 희생과 고난을 자학적으로 즐기지 않고, 생명과 사랑의 세계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신앙 고백임 3-2. 바울의 순교와 기쁨 - 사도바울은 희생 제물이 되어도 기뻐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다 당하게 되는 고난과 희생을 기뻐함 - 바울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 생명과 사랑의 세계를 위해 살겠다고 고백함 - (중요)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무얼 지향하며 희생을 즐기는가 하는 것임 - 바울은 자신의 제물로 드려진다 해도 기뻐하며, 빌립보 교인들과 함께 기뻐함 - 순교를 염두에 두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흐름이며,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생활이었음 3-3. 죽음을 대하는 신앙 -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반열에 들어갔고, 희생의 환경은 말틴 루터보다도 100년 뒤에는 대단한 인물이 나올 것임 - 종교 개혁 운동을 일으킨 얀후스는 화형을 당했지만, 죽음은 100년 뒤에 대단한 인물이 나올 것임을 믿음 - 바울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 생명과 사랑의 세계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함 - 순교를 염두에 두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흐름이며, 오늘날 신앙생활의 현실을 보여줌 - 기독교는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역사임 4. 바울의 희생과 기쁨 4-1. 사도 바울의 희생과 기쁨 - 사도 바울이 죽음 후 예수의 부활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에게 부여된 호칭임 - 희생 제물이 되어도 기뻐하겠다는 바울의 말에 대한 해석과 인식의 차이가 있음 - (중요) 희생과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통한 기쁨을 찾을 수 있다는 사도 바울의 인식을 강조함 - 개인적인 고난을 통해 기쁨을 얻는 것이 아니라, 희생을 통해 기쁨을 얻는 것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함 4-2. 기쁨의 본질과 선물로서의 기쁨 - 기쁨의 본질은 개인적인 측면에서 외부적 요인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 기쁨은 개인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 선물 중 가장 큰 것이 예수 그리스도임 - (중요) 예수 그리스도 중심에 있는 순교의 반열에도 기쁨이 있음 - 기쁨은 인생을 자유롭게 하고, 평안하게 하는 선물이며, 이 선물 중 가장 큰 선물임 4-3. 기쁨의 근원과 선물로서의 기쁨 - 기쁨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에 있음 - 예수 그리스도를 살고 있는 기쁨은 가장 큰 선물이며, 이 선물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임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변질되지 않는 기쁨을 얻는 길임 - (중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것에 따라 기쁨을 찾고, 이 선물에 동참하게 됨 (설교 전문) 지난 시간까지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하는 그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그 내용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생활하면서 원망과 시비 없이 살 수가 있겠느냐 본래적으로 그 점에 있어서는 누구도 자신있게 그렇다 하고 답변할 수가 없습니다. 또 한편으로 보면은 누가 어떻게 하든 또 어떤 일을 저지르든지 또 악의 횡행을 하든지 간에 상관없이 그저 원망과 시비 없이 살라하는 그런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내용이에요. 좋은 게 좋다 하는 식으로 사는 것 그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은 하나님의 나라에 질서를 세워가는데 이것이 오히려 또 방해 요소가 될 가능성도 있다. 하는 그런 말씀이죠. 어쨌든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저 세상을 살면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으니까 그저 마음 착하고 좋은 사람들로써만 살아가야 된다. 하는 뜻으로 받기에는 참 어려운 부분이 있다. 오늘 바울이 주신 이 원망과 시비가 없이 살아가라고 하는 말씀은 또 상당히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을 해볼 수가 있는 것이죠. 근데 하여튼 지난 시간까지 이런 내용을 가지고 좀 말씀을 생각을 해 보았는데 오늘은 인제 사도바울이 제물이 된다라고 하는 그 말씀과 더불어서 또 빌립보서 전체의 핵심적인 주제 단어 중의 1인 기쁨에 관한 내용으로 좀 마감을 해 보려고 합니다. 바울사도는 교인들에게 자기자신이 희생 제사의 재물이 되어도 그것을 기쁘게 받아 드리겠다고 언급을 했습니다. 물론 예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구약성경에 나오고 있는 그런 개념의 희생 제사라고 해석할 수는 없겠죠. 여기서 그렇다면은 바울이 자기 자신이 희생 제사의 재물이 되어도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라고 하는 표현은 믿음을 위한 믿음을 위한 희생 제사 재물이 되어도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 하는 말씀으로 우리가 해석을 해볼 수가 있겠습니다. 상당히 비장한 그런 말씀이잖아요. 자기가 희생 재물이 되어도 기쁘다 그러니까 희생 재물 희생 지사의 재물 그것은 목숨을 드리는 일이기 때문에 또 생명을 바치는 일이기 때문에 비장한 말이에요. 물론 바울이 이렇게 비장한 노트로 이야기하는 아주 구체적인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쉽지가 않겠습니다. 단순하게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어떤 심정을 그렇게 피력했나 그렇게 생각을 해볼 수도 있겠고요. 또 한편으로 좀 실제적인 문제이지만 현재 바울이 지금 옥살이를 하고 있는데, 감옥에 있는 것인데 재판 중이란 말이죠.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런지 그거는 뭐 바울이 알겠습니까? 그건 진행하는 사람들이 아는 내용이죠. 현재 진행 중인 이 재판의 마지막 판결이 정말 바울에게는 불리한 판정이 나와서 만약에 내가 죽더라도 그것을 달게 받아들이겠다. 기쁨으로 받아들이겠다. 하는 그러한 비장한 표현일 가능성도 있겠다. 왜냐하면,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것은 구약시대적인 재물 희생재물 차원 고원을 넘어서서 믿음을 위한 희생 제4의 재물로 여길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가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그 단 1가지 이유 때문에 지금 재판을 받는 중이고 재판의 결론이 사형 온도가 내려져도 자기는 그것을 달게 받아들이겠다. 어쩌면은 이것도 하나의 이런 표현을 하게 된 근거가 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하여튼 간에 이 편지를 쓰고있는 사도바울은요, 크리스도를 위해서 를 믿는 신앙공동체인 빌리보 교회를 위해서 자기는 이런 모습이든 저런 모습이든 희생 재물이 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하는 것만은 분명한 의지이고 또 한편으로 보면 신앙 고백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구약시대 때에 여러 종류의 제사가 드려진 것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잘 파악을 합니다. 여러 종류의 제사들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제사를 들라 그러면은 그것은 희생제사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고 그리고 죄인들은 용서를 받아야 되기 때문에 죄인들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가 희생 제사 아니겠습니까? 이 희생 제사 가운데에서도 여러분들이 인제 자주 듣는 그런 내용이지만은 대 제사장이 1년에 한 번 대석죄 이래 지성소까지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에 이제 희생 제사를 드리는 모든 백성들이 1년 동안의 죄를 속하는 희생 제사를 드리는 그것을 우리는 위험 키프로라 그렇게 부른다고 잘 알고 계실 거예요. 대속죄일 이 염키프로 대속죄일의 희생제사 핵심이 뭐냐 역시 사죄를 받기 위해서 대신 죽음을 당하는 제물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구약성경 제사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을 대신한 동물의 재물 뭐 대개는 그렇게 정리가 되겠죠.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소를 바치거나 또는 뭐 양을 바치거나 또는 염소라고 표현이 되기도 하구요. 비둘기를 받치거나 이런 그 동물들을 잡아서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써 자신들의 죄가 사해진다라고 하는 에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지요 이 용키푸르 때에 특히 이제 2마리의 염소를 가지고 지비뽑기를 해서 1마리는 이렇게 죽여서 재단에 그 피를 뿌리게 되어 있고 또 1마리는 아사살의 염소라고 해가지고 머리에다가 제사장에 손을 얹어 기도를 하고 백성들의 죄를 쉽게 표현하면 거기다 뒤집어 씌우고 사람들이 전혀 보이지 아니하는 광야로 내보내지 않습니까? 아사셀의 염소라 구하는 유명한 하나의 제도라고 볼 수가 있겠는데요. 살아있는 염소에게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 기도를 하고 안수기도 그죠 뭐 짐승이라도 그런 거 하지 않습니까? 안수 기도를 하고 사람이 없는 곳 광야에다가 그냥 내보내는 어떤 사람들은 해석하기를 아사셀을 위한 염소라고 하지만 이 아사셀이라고 하는 표현 자체가 광야에 살고 있는 광야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의 영적인 존재 또는 귀신 그처럼 해석하기도 합니다. 정확하게 이게 뭘 의미하는지는 우리가 잘 파악하기는 쉽지 않겠습니다만 어쨌든 1마리는 그렇게 제물이 돼서 피를 제단에 뿌리게 되어 있고 1마리는 산 채로 내보내 가지고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광야로 쫓겨나가는 그런 염소 제물이라고 하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광야에 나가서 당연히 뭐에 잡혀 먹든지 잡혀 먹게 돼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뒤의 일은 우리가 잘 알 수 없는 것이지마는 이 아사셀의 염소를 내보낼 때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곳까지 그것을 끌고 가 가지고 내보내는 거예요. 사람이 보이거나 하지 않는 곳 그런 곳에다가 이 아사셀의 염소를 풀어주게 돼 있다. 죽으라 그런 이야기죠 그 광야에서 염소가 1마리 2마리 이렇게 다니는 경우 거의 없습니다. 집단으로 생활을 하게 되어 있는 습성을 가지고 있고 또 혼자서 돌아다닌다고 하는 것은 날 잡아먹으시오. 하고 다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거예요. 근데 여기 인제 대석죄일에 풀어놓는 한 마리는 그런 용도로 풀려지는 것이다라고 볼 수가 있겠는데 어쨌든 간에 이게 다 사람들의 죄를 대신한다. 그래서 소위 말하면 희생 제사의 재물들이다라고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제사 행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이 두말 할 것 없이 제사장입니다. 제사장 대 제사장 수많은 제사장들 가운데 그 해 하나를 집이 뽑혀서 대제사장으로 섬기는 대제사장까지 수없이 많은 제사장들이 있잖습니까? 지금이야 이스라엘은 뭐 성전이 없기 때문에 이 제사장 시스템이 무너져 있는 상태이기는 하겠습니다. 이 제사장들이 실제적으로 성전에서 하는 일이 뭐냐 그거를 생각을 해보면요 좀 비위가 약하신 분들 생각하기도 싫은 그런 일을 제사장들은 해야 되는 거예요. 짐승을 잡는 일 피를 받아내고 피를 뿌리는 일 이게 인제 제사장들이 하는 일이란 말이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여러분들 뭐 지금이야 다 뭐 다 해주니까 그럴 리가 없지만은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닭 잡고 토끼 잡고 하는 건 다 집에서 했어요. 그죠 또 돼지 잡고 소 잡는 것까지도 다 마을에서 동네 사람들끼리 그렇게 하기도 하고 저는 인제 닭을 잡고 토끼 잡는 것은 제가 같이 뭐 아버님 도와서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 가지고 그거를 제가 직접 칼을 대거나 뭐 그건 하지 않는 거죠. 어른이 하고 나는 옆에서 도와주는 일만 한 건데 생각해보면은 제 위에 형이나 제 밑에 동생이나 다 도망가고 없어요. 저 혼자만 그 일을 늘 도와드렸어요. 그래서 그거를 또 털을 벗긴다 하고 또 뜨거운 물에 튀긴다고 그러잖아요. 튀겨 가지고 털을 다 뽑아내고 배를 가르고 하는 그런데 유대교의 제상들이 하는 일은 똑같은 일은 아니지만, 비슷한 일을 하는 거예요. 성전에서 가끔 다른 종교에서 이렇게 재물을 잡는 또는 비슷한 일을 하는 것들을 볼 수가 있거든요. 끔찍해요. 사실은 참 끔찍한 일이에요. 그것도 짐승들이 죽는 고통을 오랫동안 가지지 못하도록 단번에 죽인 거예요. 단번에 단번에 죽이는 게 뭘까? 여러분들 어떡하면 단번에 죽나요? 우리 김성순 검사님 아셔 자꾸 우시는 거 웃으시는 거 보니까 단번에 죽이는 게 어떤 방법일까요? 요즘처럼 뭐 전기를 킥 해가지고 기절한 다음에 죽이는 걸까 아님 목을 따는 목을 딱 따버리는 피를 얼른 팍 쏟아내게 하고 이 죽는 고통을 줄인 줄여 상당히 줄이는 거죠. 금방 죽어요. 그 엄청난 덩치를 가지고 있는 소도 금방 죽어요. 제가 가끔 언급을 했지만은 제가 보니까 우리 네팔에 가서 활동을 했던 우리 유 장로님 딸도 거기를 갔다 왔다고 하니까 나두 뭐 거기를 가본 사람이니까. 네팔은 그게 전반적으로 힌두교 종교거든요. 힌두교 최근에 예 종교의 자유가 조금 주어져 가지고 기독교인들이 굉장히 많이 늘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네팔 같은 나라 여전 전히 힌두교가 지배하고 있는 그런 근데 힌두교의 신들이 엄청나게 많지 않습니까? 그중에 피를 좋아하는 신 칼리신이라고 하는 신이 있는데, 그 칼리신을 섬기는 그 신전 같은 데를 가보면 일단은 일단은 냄새가 너무 역한 거죠. 사실은 너무 욕해요. 짐승들 죽음과 관련된 그런 시간들이 대부분이니까. 그리고는 신전을 가는 그 길이 전부 다 제물투성이 염소든 양이든 닭이든 뭐 이런 팔고 사고 하는 거죠. 여러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실 때에 그런 짐승들을 사고 파는 상을 다 뒤집어 엎으셨다 다 상상이 가시잖아요. 그 쑥 들어가 보면은 그 신발도 신어서도 안 되고 양말도 신어서도 안 되고 피와 오물투성이의 현장을 말하자면, 맨발로 들어가 있는 저는 도저히 그거는 못 하겠어서 그냥 멀찍이서 그런 장면만 지켜봤습니다마는 까 제사장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치는 재물의 목을 따고 피를 쫙 뿌리고 그리고는 그 죽은 제물들을 이제 옆에 있는 큰 뜨거운 물이 펄펄 끓는 솥으로 옮기면은 그거를 인제 처리해 가지고 바친 사람들이 가져가든지 뭐 어떡하든지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게 형편없는 그런 모습이지만은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은 그런 모습이 있다. 그거는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그런 내용들입니다. 매일같이 그러한 행위들이 벌어지는 거예요. 내가 만약에 구약시대 때의 유대인도 아니지만, 상상을 해보면은 제사장이라고 한다면, 그런 역할을 감당할 수가 있었겠는가 또 유대인 또 유대교의 성직자 아니라고 하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간에 구약성경의 제사 행위는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는 제물이 반드시 필요한 거예요. 희생제사 그러나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가 우리 모든 인간들의 죄를 대신 감당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흘리신 피로 끝난 것 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이라고 하는 또는 희생 재물 희생 제사라고 하는 이 의미는 우리 예배를 통해서 그 의미는 계속 반복되는 거예요. 우리가 버릴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성만찬을 나눌 때에 예수님의 몸을 뜻하고 하고 피를 뜻하는 빵과 포도주를 모셔드린다 이게 바로 그런 재물 대신 예수구리스도를 우리가 모셔드린다고 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것 아닙니까 희생 제사 희생 재물의 뜻이 우리 예배 행위와 늘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다. 하는 것을 확인해 볼 수가 있는 거죠. 우리들은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피로 사죄를 받고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을 믿음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이것은 단순하게 믿음의 내용으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 실존을 규정하는 아주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거예요. 말하자면, 놓쳐서는 안된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늘 그런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이죠. 말씀 주시기를 밀 1알의 밀 이야기를 하시지 않습니까? 1알의 밀이 떨어져 죽어야 되는 것이지. 죽지 않으면 무슨 열매가 있겠습니까? 이런 희생의 개념이 우리 그리스도인들 삶 전체를 감싸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우리 기독교의 역사는 그런 차원에서 보면은 순교의 피를 거름으로 삼아서 성장한 신앙이고 종교라고 하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겠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남양 성지성모 교인들과 같이 갔다 와 가지고 계속 그 얘기를 또 드리고 있습니다마는 1866년도에 거기도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들이 많이 나왔는데 이름 없이 순교한 사람들 무명의 순교 순교자들 우리 교회 이 자리는 같은 병인박해 때에 4분의 순교자가 탄생한 자리 가톨릭에서는 성지라고 그러죠 그 성지는 가톨릭이 어마어마하게 개발을 해 놓은 거죠. 상당히 크게 개발을 해 놓은 거예요. 거기 면적이 전체가 3만 평 정도가 되니까. 우리 교회 이 울타리 안에 땅면적에 비해서 한 20배가 넘는 그런 면적을 개발을 했는데 처음부터 그렇게 넓은 땅이 아닌 거죠. 3천 평 정도밖에 안 되는 그 개발 가능한 지역을 이상각 신부라고 하는 분이 35년 동안 거기 머무르면서 계속 땅을 사들인 그래 지금 같은 규모를 가지고 있는 거죠. 우리 교회야 천주교인들의 순교회 터전 위에 개신교회가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그런 계획을 가지고 이유도 없고 또 그러기는 하겠습니다마는 어쨌든 뭐 기독교가 됐든 가톨릭이 되었든 간에 기독교 이천년의 역사를 생각해보면은 이게 순교의 피 이게 거름 삼아져서 지금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말해도 틀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순교의 피 또는 희생에 의해서 믿음을 근거로 한 희생에 의해서 우리가 존재하고 교회가 존재한다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은 이게 구약성경의 희생의 개념 희생의 의미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내용이다라고 하는 것을 판단해 볼 수가 있는 것이죠. 물론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뭐 이런 측면에서 또 오해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자기 희생이다. 그렇게 정리를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뭐든지 포기해야 된다. 더 나아가 보면은 세상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데까지 갈 수 있는 정신이 희생 정신입니다. 삶 자체를 부정하는 거예요. 초대교회 때로부터 그런 신앙적인 흐름들이 처음 교회들을 힘들게 했던 내용들이 있지 않습니까? 한편에서는 상당히 쾌락주의적인 그런 입장을 가진다고 한다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매우 금욕적인 삶의 태도를 유지하면서 이것이 참 신앙이다라고 주장하는 그런 흐름들이 있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금욕주의적인 자기자신을 철저하게 부인하고 희생함으로 인하여서 그리고 인간적인 삶을 세상의 삶을 포기하면서 이루어지는 그 신앙만이 옳은 신앙관이라고 하는 그런 주장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을 생각해보면요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지만은 인간의 삶 자체를 부정하라고 하는 말씀 한번도 하신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거예요. 희생이라고 하는 것이 이게 무조건적인 자기희생 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삶 자체를 부정하고 금욕주의적인 입장에서만 삶을 누리는 건 그게 아니라는 것이죠. 자기 십자가는 분명히 져야 되지만 이 사회에서 세상의 삶을 포기하거나 부정하라고 요청하신 적이 없다.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장에 보면은 가나라고 하는 아주 조그마한 마을에 가셔서 혼인 잔치의 물을 가지고 포도주를 만드신 그런 표적을 일으키시지 않았습니까? 혼인잔치 이거는 검역주의자들은 찾아가는 곳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어머니와 제자들과 함께 그 잔치 참여해서 그리고 포도주가 떨어진 그 흥이 떨어진 잔칫집의 흥을 포도주를 만들어 주시므로 돋우어 주신 분이시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죠. 물론 이것은 요한복음 이장의 가나형 혼인잔치라고 하는 것이 큰 틀에서 보면은 살 맛이 떨어져 있는 세상의 살맛을 허락하신 예수님 그렇게도 우리가 해석해 볼 수 있는 여지가 큽니다. 어쨌든 간에 세상의 삶을 결코 부인하지 않으셨다 온갖 금욕과 그리고 경건의식에 아주 그냥 깊이 빠져있던 바르세인들의 눈에는 그러므로,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언제나 먹고 마시기를 좋아하고 또 죄인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분으로 피쳐지는 것은 당연했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자 기독교가 말하고 있는 이 십자가와 희생의 의미 또는 희생 재물의 의미 이거는 삶을 부정하거나 또는 희생 자체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높은 차원의 내용을 거기에는 담고 있다. 하는 것을 말씀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은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다가 주의 나라를 추구하다가 받게 되는 고난과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게 지금 사도바울이 자기가 희생 제물이 되어도 기뻐하겠노라 하신 그 의미예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다가 당하게 되는 고난과 희생 기쁨으로 기꺼이 감수하겠습니다. 희생과 고난을 자학적으로 즐기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사랑의 세계를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 신앙 고백이요. 또 의지에 표현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위해서 무얼 지향하면서 그런 희생을 즐기는 사람이냐 이게 중요하다 그런 이야기예요. 그렇게 보면은 바보처럼 늘 희생만 하는 거 그거 주님께서 원하시는 건 아닌 것 같애요. 그리고 뒤에 가서는 항상 힘들어하고 불평하고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지향성이 분명해야 되고 하나님의 나라 건설 거기에 내 자신이 재물처럼 받쳐줘도 희생제물이 되어도 기쁘겠다. 하는 아주 차원 높은 그런 데까지 이 내용이 올라서야 된다 라고 하는 것을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수가 있겠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제물로 들여준다고 해도 기뻐한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요게 인제 이 기쁨이라고 하는 단어 자체가 또는 기뻐한다 라고 하는 이 개념 자체가 필리버스 전체를 꿰뚫고 있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 되겠습니다. 17절 18절에 걸쳐서 사도바울은 4번씩이나 기뻐한다라고 하는 그런 말씀을 합니다. 자기자신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빌리퍼 교인들과 함께 기뻐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교인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하면서 나와 함께 기뻐하자고 또한 덧붙여 놓고 있습니다. 물론 인제 처음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여기 제물이라고 하는 단어와 기쁨을 연결해 볼 때의 순교의 반열에 참여하는 것에 그 기쁨을 두고 있다 라고도 해석을 해볼 수가 있겠습니다. 여러분 바울 시대에는 예술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또 그리스도인이 되고 또 믿는 자들의 신앙공동체인 교회 멤버가 된다라고 하는 것은요, 이거는 현실적으로 순교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흐름들입니다. 순교를 염두에 두고 그러니까 우리가 말로는 쉽게 표현합니다마는 2천년 전의 로마 제국 하에서 예수를 믿고 예수 믿는 사람들의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출석하고 몰래 예배를 드리든 아니든 간에 그건 다 뭘 담보로 해서 하는 일이냐면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일이에요. 생명을 담보로 진짜로 죽는 거거든요. 그런 차원에서 보면은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글쎄 뭐 어느 정도로 평가를 해볼 수가 있겠나요?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생활 죽음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교회 생활 그때 생활이라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반열에 들어서고 대열에 들어서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처럼 기독교가 자리를 잡고 기독교 신앙이 생명의 신앙으로서 이렇게 우두커니 설 수 있었다고 하는 것 그런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요 우리 인간들의 예상을 훨씬 더 뛰어넘는 생명의 역사라고만 우리는 신앙 고백할 수가 있겠습니다. 근데 우리 고백이죠. 근데 실질적으로 이게 죽는다고 하는 것은요, 끔찍한 일입니다. 그냥 자연사가 아니고 그것도 눈에 뵈지 않는 하나님을 믿다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신앙 고백하고 공동체 생활을 하다가 단 1가지 때문에 죽음을 당한다고 하는 건 누구나 피하고 싶은 운명 아니겠습니까? 짐승들도 피하고 싶은 것들 있죠. 그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들이요. 다 알거든요. 그거 어떤 짐승은 막 울어요. 울어 눈물을 막 흘려 우리 인간들처럼 그런 슬픔을 느껴서 두려움을 느껴서 흘리는 눈물인지 아닌지 그건 뭐 눈물의 성분을 좀 조사해보고 해야 되겠지만, 하여튼 울어요. 그걸 피할려고 하고 자꾸 뒷걸음질 칠려고 하고 저는 그 소를 잡아서 제물로 바치는 그 모습 다른 짐승들보다도 왜 그러냐 하면요 소가 이 눈망울이 엄청나게 크잖아요. 겁이 많은 짐승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뭐 2살장 가까이 간다든지 또는 제물로 바쳐지는 순간에 그것들은 눈물을 흘리고 또 두려워하고 뒷걸음질 치고 그러니 사람이 그런 순교의 자리에 들어선다라고 하는 것은 그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환경 아니겠습니까? 말틴 루터보다도 100여 년 전에 체코에서 종교 개혁 운동을 일으켰던 얀후스가 화형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 야누스가 설교를 했던 예배당 그 벽면에 보면은 야한 호수가 불타는 장면이 그대로 크림으로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화형을 당합니다. 그때 얘기했는지 언제 얘기했는진 모르지만 나를 이렇게 죽이지마는 100년 뒤에는 대단한 인물이 나올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하죠. 그냥 후수라고 하는 말 자체가 거위 거위를 키우는 집의 아들이에요. 근데 100년 뒤에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죽으면서 그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환희 이게 사로잡혀서 할 수 있는 그런 신앙 고백이고 또 희망찬 그런 선언이라고 볼 수가 있겠는데 누구나 다 그렇지는 못하죠. 끔찍한 환경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요. 자기가 희생 제물이 되어도 기뻐하겠다. 나와 함께 기뻐하자고 요청을 할 때에 그 기쁨 이거를 실제로는 고통스러운 일이지만은 어쩔 수 없으니까 또 자기가 교회 지도자이고 또 대단한 위상을 가지고 있는 사도이고 사도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에게만 직접 체험한 사람들에게만 부여되어지는 호칭인데 이게 많은 교인들 앞에서 만약에 죽어가면서 응 보통 사람들처럼 그렇게 죽어가면 되겠나 그러니까 바울이 그런 걸 생각해 가지고 엄청나게 고통스럽지만은 어쩔 수 없어서 기쁜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또 미워하는 것이냐 어떤 사람들은 또 그렇게 해석하기도 하겠죠. 했습니다. 마치 이제 교회 생활을 하면서 교인들이 이게 지 잘못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고핍박을 당하면서도 내가 신앙 때문에 교회 때문에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을 당한다라고 그렇게 억지를 펴는 것처럼 그런 것인가? 과연 순교를 당하는 것이 기쁨일 수 있겠는가 또 그 순교의 내용을 기쁨으로 공유할 수 있겠는가 이거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내용이죠. 저는 이 바울이 빌리퍼 교인들에게요 자기가 재물이 되어도 기뻐한다. 나의 이 기쁨에 동참하라 라고 하는 그런 말씀을 할 때에는요 이거 그 기쁨의 본질이 뭐냐 하는 거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받아들임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해 저도 그렇고요. 여러분들이 세상 살면서 기뻐할 때가 언제인가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 기뻐하십니까? 뭐 일반적이지 않겠어요. 오늘 뭐 미국의 대통령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지만은 누가 됐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는 들립니다. 엄청나게 기쁜 일 아니겠어요. 전 세계 경찰 국가로서의 최고 통치자가 된다고 하는 게 굉장히 기쁜 일이죠. 건강한 것도 기쁜 일이고 자식이 잘되는 것도 기쁜 일이고 출세하는 것도 이게 일반적인 기쁨의 개념으로 보면은 성공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도 더 크게 기쁘게 살아야 돼요. 정말 그런가요? 그렇지 않아요. 돈이 많으면 더 기쁘다 돈 적은 사람보다 그러면 돈이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기쁘게 사는가 아니요. 더 불안하게 살 수밖에 없어요. 기쁨의 본질이 뭐냐 특별히 사도바울이 언급하고 있고 우리 기독교가 주창하고 있는 이 기쁨의 본질이 뭐냐 하는 것을 확인을 해 둘 필요 필요가 있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요,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말하자면, 성취할 수 있는 그런 내용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 스스로가 기쁨을 성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마치 우리 스스로가 평화를 이룰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가 사랑을 온전하게 누릴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인간이 소유할 수 없는 것처럼 기쁨도 우리가 소유할 수 없는 대상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뭐냐 하는 거죠. 기쁨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상품과 같은 그런 성질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 바울이 말하고 있는 자기가 제물이 되어도 기뻐한다라고 하는 그 기쁨은요, 한 인간으로 보면 도저히 누릴 수 없는 기쁨이에요. 당연히 그렇지 않아요. 상황이 하나님이 주실 때만 누릴 수 있는 기쁨 이게 아마 사도바울의 언급하고 있는 그 기쁨이 그런 내용이라고 확인을 해볼 수가 있겠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의 개념으로서의 기쁨이라고 할 때요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 중에 가장 큰 선물이 뭘까? 이거를 판단을 해보면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살고 있는 온전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고 있는 이 땅 가운데에 오시게 하신 일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시겠다고 하시는 약속 그리고 때가 되면은 다시 오신다고 하는 약속 이것들이 기쁨의 근원이라는 거죠. 예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의 기쁨이라고 할 때 가장 그 기쁨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에 있다.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것 때문에 기꺼이 순교의 반열에도 들어설 수가 있는 것이죠. 이 기쁨이야말로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 인생들을 자유케 하는 또 평안을 누리게 하는 그런 기쁨이고 선물이라고 확인을 해볼 수가 있겠습니다. 바울이 이러한 기쁨을 누리게 된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가 희생 재물이 되어도 기뻐한다. 그냥 나의 기쁨에 함께 동참하자고 요구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이죠. 여러분들 정말로 기쁨의 본질이 뭔지를 늘 파악하고 나에게 선물로 주어진 이 기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을 제대로 누릴 줄 아는 신실한 성도들 되시기를 제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마침기도)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빌립보서의 말씀을 통하여 사도 바울이 참 어려운 이야기지만은 그가 희생 제물이 된다. 할지라도 기뻐한다고 했고 또 이러한 기쁨에 빌립보 교인들이 함께 참여하기를 원한다. 하는 말씀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주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어쩔 수 없는 인생들이기 때문에 기쁨이 무엇인가 어떤 것이 기쁜 일인가에 대한 관심을 깊이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정말로 그것이 기쁨의 근원이 될 수 있는지 늘 점검하게 하시고 깨우치게 하시고, 또 회개할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아들을 보내주시고 그로 하여금 크리스도가 되게 하셨는데 그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그분 안에 거하는 그 기쁨이야말로 변질되지 아니하는 영원히 연속되는 기쁨의 근원된다고 하는 것을 다시 신앙 고백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로 주어지는 참 기쁨의 삶을 열심히 살아갈 줄 아는 이 자리에 함께한 모든 성도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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