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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공동예배

브니엘의 아침, 야곱 이야기Ⅱ
2026-08-10 15:35:56
청주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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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봉독 : 창세기 28장 10절-22절

*말씀선포 : 브니엘의 아침, 야곱 이야기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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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장로 2026-08-12 19:50:02
(2026년 8월 9일 청주제일교회 공동예배 설교) 설교입니다. 성경 봉독 (창세기 32장 22절~31절)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은 구약 성경 창세기 32장 22절부터 31절까지 말씀 봉독해 드립니다. 창세기 32장 22절부터 31절까지입니다. >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정과 열 아들을 인도하여 야뽁 나루를 건널세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아멘. > 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서론: 평화통일주일을 맞이하며 오늘 2026년 평화통일주일을 맞아서 지난주일에 이어 믿음의 조상인 야곱에 관한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오래전에 헤어진 형 에서와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로 씨름을 하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야곱을 통해서, 저는 평화통일주일을 맞이한 우리 민족이 어떤 모습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복된 시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아멘. 어젯밤에는 좀 시원하게 주무셨죠? 하루가 이렇게 확 바뀔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창문을 닫고 잘 정도로 바람이 들어와서 하여튼 잠을 잘 이루었습니다. 야복나루의 씨름과 환도뼈(고관절) 창세기 32장 22절 이하를 보게 되면은 야곱이 야복나루를 건너기 전날 밤에 어떤 존재와 밤새도록 씨름을 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그게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천사라고 우리가 해석을 해야 되겠습니다. 근데 그 하나님의 사람이 야곱을 힘으로는 이길 수 없게 되었는지 결국에는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내리쳤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내리쳤다 하는 것이죠. 번역본에 따라서 야곱이 다친 부위에 대한 표현이 조금씩 다르기는 합니다. 옛날 개역한글에서는 여러분들에게 아주 익숙한 용어죠, '환도뼈'를 쳤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환도뼈는 엉덩이뼈를 말하는 것이죠. 오늘 읽은 성경에는 허벅지 관절이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또 새번역 성경이나 현대인의 성경 같은 것을 보면 엉덩이뼈 또는 엉덩이 힘줄 그렇게 번역을 해놓고 있습니다. 하여튼 뼈가 탈구가 되었든지 고관절이 부러지거나 문제가 생겼다고 하는 것은 야곱이 그 이후로는 힘을 쓸 수 없는 단계가 되었다 하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야곱의 극심한 불안과 형 에서 근데 이렇게 심하게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그 사람,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를 끝까지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야곱의 상태, 야곱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매우 불안한 상태이고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갈팡질팡한 그런 상태였다고 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잠시 후에 20년 전에 자기의 속임수와 거짓말로 속아 넘어가고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형 에서를 만나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0년이 지났어도 그 잘못한 것, 속였던 것, 사기쳤던 것, 아버지까지 속였던 그것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죠. 죽을 때까지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형 에서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동생 야곱 아니겠습니까.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이스라엘'과 '브니엘' 그러는 중에 여명이 밝아왔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즉 하나님의 천사가 야곱에게 "이제 나로 하여금 가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특이한 표현이지요.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인데 이렇게 보내 달라고 하는 요청에 대해서 야곱이 답변을 합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축복해 달라는 거예요. 그리고는 계속 대화가 이어집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앞으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로 불릴 것이다." 그랬더니 야곱이 다시 묻습니다. "당신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왜 내 이름을 묻느냐?" 대답을 하지 아니하고 그 사람, 하나님의 천사는 야곱을 축복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야곱은 그곳 이름을 (야복나루 아닙니까) 브니엘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하는 뜻이 되겠습니다. 지난주일날 베델, '엘'이 하나님이라 말씀드렸잖아요. 브니엘, '엘'도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얼굴'. 여기 브니엘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여 놓았습니다. 창세기 32장 30절 말씀이지요. >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 함이더라. > 이 비슷한 장면이 20년 전에도 있지 않았습니까. 형 에서를 피해서 어머니의 도움으로 외삼촌 라반의 집 하란으로 가게 되다가, 한 3일 거리 떨어진 곳에서 돌베개를 삼고 자다가 꿈을 꾸고 천사가 하늘과 땅을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고 드디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땅을 너에게, 네 자손에게 주겠다" 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 아버지 이삭에게 하셨던 약속이 이제 손자요 아들인 야곱에게까지도 들려지게 되었습니다. 축복을 받은 거지요. 꿈에서 깨어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는 뜻의 '베델'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집 베델이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얼굴 브니엘과 대비가 되기도 합니다. 20년 전에는 '하나님의 집 베델'이라고 하는 지명이 야곱 때문에 탄생했다고 한다면, 20년 후에는 야복나루터에서 '하나님의 얼굴 브니엘'이라고 하는 지명이 또한 야곱 때문에 탄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란에서의 20년과 야곱의 거부(巨富) 그 20년 동안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짐승들을 치는 목동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이에 라반 외삼촌의 두 딸을 부인으로 얻었고, 이 두 딸들의 몸종들인 빌하와 실바를 또 부인으로 얻었고, 부인이 넷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아들 11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에 얻은 아들이 요셉이죠. 물론 막내가 따로 있습니다. 베냐민, 베냐민은 그 이후에 얻은 아들이기 때문에 이때까지는 11명의 아들이 되겠습니다. 하란에서 외삼촌 라반의 재산을 관리를 하면서 자기 이름 그대로 속임수를 썼는지 어떤 수단 방법을 강구했는지 삼촌 가축이 대부분 야곱의 소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30장과 31장에 따르면은 20년 동안 머물면서 이렇게 큰 부자가 된 과정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라반과 야곱 사이에 정당한 품싹 계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 조건은 무엇이었느냐. 정상적인 짐승들은 다 라반의 것이고, 희귀하고 변종에 해당이 되는 점이 있고 아롱지고 얼룩진 것들은 야곱의 몫으로 한다 하는 계약 조건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해가 되지 않는 그런 방법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야곱은 꾀를 내 가지고 라반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야곱의 뜻대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니까 처남들이 야곱을 비난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자기 아버지 재산을 야금야금 빼앗아 간다는 것은 자기들의 재산을 축내는 것과 똑같기 때문에 비난할 수밖에 없어요. 거기다가 장인이고 외삼촌인 낯빛도 변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아, 이제는 떠나야 되겠구나.' 하란에 머물기가 어렵게 되었다고 판단을 하고 가족과 일꾼들과 가축을 끌고 고향 브엘세바로 가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400명의 사병과 극심한 두려움 아주 큰 부자가 되어서 고향 땅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자식도 많고 부인도 많고 재산도 엄청난데, 이 야곱의 생각을 짓눌르고 있는 걱정거리가 큰 게 하나가 있었습니다. 고향을 가면은 20년 전에 그렇게 헤어진 형 에서를 만나야 된다고 하는 크나큰 부담입니다. 형 에서가 20년 전에 자기를 때려죽이려고 달려들었었는데 여전히 그럴 것인지 아니면 받아줄 것인지 그게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대비하기 위한 그런 조처를 취하는데 그 이야기가 창세기 32장 앞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형 에서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일꾼들을 보내 가지고 이렇게 전했습니다. "형님, 저는 외삼촌 라반과 지내면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근데 이제는 형님 도움으로 고향 땅에서 살려고 돌아왔습니다." 이런 내용의 전갈을 일꾼들을 통해서 형 에서에게 전했습니다. 그리고는 기다리고 있는데 일꾼들이 돌아와서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당신의 형 에서가 400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당신에게 오고 있습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너무 겁나는 그런 전갈 아닙니까. '아, 때가 왔구나. 20년 전에도 죽을 뻔했지만 이번에야말로 내가 형 손에 죽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400명의 사람들, 부하들을 데리고 있었다 하는 것은요, 아브라함도 그랬지만 그때 당시에는 개인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은 사병, 개인이 운영하는 병사들을 데리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 숫자가 400명이나 된 거예요. 현재 우리나라 군대로 보면 대대급이 한 600명 정도 된다고 하니까 그거보다 좀 못 미치기는 하지만 엄청난 사병을 에서가 거느리고 지금 동생 야곱에게 오고 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32장 7절에 보니까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했다'고 그런 심경을 표현을 해놓고 있습니다. 심히 두렵고 답답했다. 20년 전에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었던 하나님의 약속이 자기에게도 주어지게 되니까 그는 "두렵도다, 두려운 곳이여"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부른다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근데 오늘의 두려움은 그때 두려움하고는 다른 차원이에요. 그때는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이었지만, 지금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하는 큰 뜻보다는 자신의 목숨만이라도 구해 보고자 하는 그런 반응에서 나오는 두려움. 이게 에서의 400명 군사를 보고 또는 전해 듣고 가지게 된 야곱의 상태였습니다. 야곱의 계산: 무리를 나누고 대규모 예물을 보내다 야곱은 어쨌든 꾀가 많은 사람입니다.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사람이 '이 위기를 어떻게 모면할까.' 일단 일꾼들하고 가축들을 두 대대로 나누었습니다. 에서의 사병들에 의해서 한쪽이 공격을 당하게 되면 다른 쪽이라도 살려두어야 되겠다고 하는 판단인 것이죠. 그리고는 형 에서에게 줄 예물을 챙기기 시작을 했습니다. 예물, 뇌물에 모든 사람들이 다 약하죠. 저도 그럴 거예요. 근데 이 에서에게 줄 이 예물의 양이 어마어마해요. 성경이 그 숫자를 다 기록을 해 놓았습니다. 암염소가 200마리, 순염소가 20마리, 암양이 200마리, 순양이 20마리, 어미 낙타 30마리와 그 새끼 낙타들, 암소가 40마리, 황소가 10마리, 암나귀 20마리, 새끼 나귀 10마리. 암컷들이 훨씬 많죠. 그건 동물의 세계니까 그런 것이죠. 이 예물의 가치가 얼마나 될까. 현재의 돈 가치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 제가 언젠가도 한번 이에 대한 언급을 한 적이 있다고 기억이 나기는 합니다. 그때 제가 얼마라고 말했는지 기억은 안 나요. 근데 여러분, 다른 동물들은 다 빼놓고서라도 낙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낙타, 여기 어미 낙타가 30마리라 그랬어요. 그리고는 그에 딸린 새끼 낙타들 마릿수는 안 나왔지만 새끼 낙타들도 딸려 있었어요.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런 나라들 가면은요, 낙타 경주를 해요. 옛날에는 몸무게가 적게 나가는 소년 같은 사람들을 등에 태워 가지고 누가 더 빨리 달리나 이 경주를 주인들이 옆에 그냥 자전거를 타고 엄청나게 같이 달리면서 경주를 하는 그런 낙타 경주가 있어요. 우리에게는 생소한 경주이지만 거기서 우승을 하거나 잘 달리는 낙타들은요, 마리당 1억 이상이 가는 거예요. 가격이 낙타 한 마리가 1억 이상이 된다는 거예요. 여기 보면 어미 낙타가 30마리에요. 그냥 뚝 잘라 가지고 1억 원이다 하면 낙타 가격만 현재 가치로 30억 원. 예, 새끼 낙타까지 합치면 더 넘겠죠. 기타 동물까지 다 합치면요, 소도 암소가 40마리고 수소가 10마리예요. 암나귀가 20마리고 새끼 나귀가 10마리예요. 그러니까 그냥 어림잡아 계산을 해 봐도 수십억 원 넘지요. 수십억 원 넘지. 자기 재산 전체는 아니겠지만 형 에서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준비한 예물의 가치가 현재 가치로 따지면 그 정도 되었다 하는 거, 이거는요 당시의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재산량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왕이나 영주가 가질 수 있을 만한 그런 재산, 또는 조공을 바치거나 외교적 화친을 위해서 보낼 수 있었던 거대 재산에 해당될 만큼의 재산을 형 에서를 위해서 준비를 했다. 형과의 화해를 위해서 과감한 투자를 했다라고도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게 해놓고는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창 32:20) 야곱이 생각, 계산이 그렇게 섰다 하는 것이죠. 홀로 남은 야곱과 져주시는 하나님 야복나루를 건널 만한 인간적인 방법은 다 동원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내들과 열 아들을 먼저 건너가게 했습니다. 드디어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밤새도록 하나님의 사람과 씨름을 했다고 하니까 야곱이 야복나루에 거한 때는 밤이든지 어둑어둑 저녁이든지 그럴 것입니다. 밤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을 연약하게 만듭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강을 건널 것인가, 아니면 나 혼자라도 살아야 되겠다 해서 다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돌아가야 될 것인가.' 생각이 매우 복잡했습니다. 그런 심각한 고민의 순간에 사람이 나타난 거예요. 그리고 날이 새도록 야곱과 그 사람이 씨름을 했습니다. 천사인지 어떤 존재인지 나와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천사라고 보통은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망가뜨렸습니다. 환도뼈를 내리쳤습니다. 움직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도 야곱은 끝까지 이 하나님의 사람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심각했다 하는 거예요. 그만큼 야곱이 간절했다라고 하는 뜻으로 해석을 해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자 그 하나님의 사람이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을 줍니다.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라고 하는 뜻의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사람들과도 겨루어 이겼지만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거예요. > 야곱이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긴 사람 야곱, 이제 이름이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근데 여러분, 어떤 인간이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길 수 있습니까.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지요. 그렇다고 성경이 거짓말을 쓴 것은 아니에요. 이 성경의 기록의 행간을 우리가 좀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절실하게 매달리는 한 사람, 환도뼈가 부러졌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사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아니하는 한 사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치사하게 이길 수는 없는 거예요. 저주셨다는 말입니다, 저주셨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신 줄 믿습니다. 아멘. 저주시는 분이에요. 이런 하나님을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구약의 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요나예요, 요나.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너 저기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내 말을 전해라.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설 수 있도록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요나는 똑똑한 사람이에요. 신앙도 깊었다고 볼 수 있어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너무 잘 알고 있었어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안다고 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것 아닙니까. 요나서 4장 2절에 보면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어요.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 '내가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저들이 회개를 하면 저들을 멸망시키겠다고 하는 생각조차도 거두어들이실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요나는 잘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니느웨 가기를 죽기보다 더 싫어했습니다. 도망치다가 다시스로 도망치다가 큰 물고기에게 삼켜져 가지고 뱉어져서 다시 가기는 했지만, 가서도 불평불만이 '내가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할 정도로 하나님의 이 속성에 대해서 요나가 불평을 터트리지 않았습니까. 자비로우신 하나님, 결국에는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제 나를 가게 내버려 달라"고 할 정도로 야곱은 끈질기게 달라붙었는데 하나님이 저주신 것이죠. 여러분, 여러분 가정에 어린 자녀들이 있는데 아빠가 그 아들하고 팔씨름을 해요. 치사하게 끝까지 이기는 아버지 있어요? 있는 힘을 다해 가지고 애 뼈가 부러지든지 말든지 그냥 손목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있는 힘을 다해 가지고 그냥 탁 해 가지고 "이겼다!" 하고... 그건 아버지가 아니죠. 아버지 심정은 그런 게 아니다라는 거예요. 엄마도 마찬가지죠. 엄마는 더하죠. 엄마는 거짓말까지해가면서 자녀들을 보호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비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죠. 하도 쫓아와 가지고 귀찮게 하니까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재판관이 이 과부의 청을 들어준다 하는 그 말씀이 들어 있지 않습니까. 단독자로서의 고독과 '브니엘의 아침' 그만큼 야곱이 절박한 상태였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야곱만 그런 게 아니에요. 모든 인간들이 다 비슷합니다. 야곱이 곧 우리라는 거예요.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오게 되어 있고, 누구에게나 절대 고독의 순간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카이로스의 때가 오게 되어 있다. 홀로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 하나님과의 관계라 하면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서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 야곱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수많은 사람들과 친교를 하고 대화를 하고 그렇게 재밌게 살아도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는 홀로 서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 야곱이 곧 우리라는 거예요. 꼭 육체의 죽음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야복나루의 야곱처럼 여러분들도 절대 타자이신 전능하신 하나님과 씨름하듯이 있을 수밖에 없는 때가 있다 하는 것이죠. 하나님을 깊게 체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하는 브니엘로 부르기 시작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있는 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이름도 없으신 분이시죠. 우상들과 다른 분이에요.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로 불렀다고 하는 것은, 또 야곱이 하나님과 대면했다고 하는 이 말씀은요, 하나님을 깊이 체험했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체험했다고 하는 뜻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하나님을 직접 그 얼굴을 만약에 있으셔서 뵈었다 하면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밑바닥으로 체험한 야곱. 실제적으로 형이 400명의 군사를 끌고 온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일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이야기,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졌다는 이야기예요. 이게 누구든지 하나님 체험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은요, 생명을 만난 거예요, 생명. 생명의 근원을 만난 겁니다. 여러분 모두가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성숙한 신앙인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비록 환도뼈를 부러뜨려서 절뚝거리고 걷고 있지만 브니엘의 아침이에요. 몸은 그렇게 상했지만 그의 영혼은 하나님을 뵈었어요. 생명을 만난 거예요. 어쩌면은 에서를 만나 가지고 죽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 만난 것으로 만족한 거예요. 그게 브니엘의 아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이다." 요한복음 14장 9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야곱이 했던 체험을 바울도 했다는 거죠. 하나님의 얼굴을 본 거예요. 그 빛을 보았다, 생명의 빛을 보았다. 결론: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축복 오늘 평화통일주일 예배입니다. 조용히 생각해보면 우리 남북이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되는 극적인 변화가 없이는 어떻게 되겠는가 두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결국에는 그렇게 두려워했던 에서 형을 만납니다. 그 장면을 창세기 33장 3~4절, 또 넘어서 10절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야곱은 맨 앞으로 나가서 형에게로 가까이 가면서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 그러자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끌어안았다. 에서는 두 팔을 벌려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서 입을 맞추고 둘은 함께 울었다. > (10절) 형님께서 저를 이렇게 너그럽게 맞아 주시니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합니다. > 남북이 이래야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평화를 이루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 평화를 위해서 살아가며 또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는데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우선입니다. 그런 체험 속에서 사랑과 화해와 평화의 삶을 살아가는 일을 위해 기도하고 애써 헌신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 자비하신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평화통일주일을 맞이하여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또 에서까지 언급을 해 보았습니다. 이 둘이 결국에는 만나서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남북이 이렇게 화해할 수 있도록 주님 길을 열어 주옵시고, 우리의 힘으로는 되지 않겠사오니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야곱이 하나님을 대면한 것처럼 생명의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먼저 이룰 수 있도록 성령 충만함으로 채워 주옵소서. 이 나라와 민족을 보살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김성회장로 2026-08-12 19:50:05
(2026년 8월 9일 청주제일교회 공동예배 설교) 설교입니다. 성경 봉독 (창세기 32장 22절~31절)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은 구약 성경 창세기 32장 22절부터 31절까지 말씀 봉독해 드립니다. 창세기 32장 22절부터 31절까지입니다. >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정과 열 아들을 인도하여 야뽁 나루를 건널세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아멘. > 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서론: 평화통일주일을 맞이하며 오늘 2026년 평화통일주일을 맞아서 지난주일에 이어 믿음의 조상인 야곱에 관한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오래전에 헤어진 형 에서와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로 씨름을 하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야곱을 통해서, 저는 평화통일주일을 맞이한 우리 민족이 어떤 모습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복된 시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아멘. 어젯밤에는 좀 시원하게 주무셨죠? 하루가 이렇게 확 바뀔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창문을 닫고 잘 정도로 바람이 들어와서 하여튼 잠을 잘 이루었습니다. 야복나루의 씨름과 환도뼈(고관절) 창세기 32장 22절 이하를 보게 되면은 야곱이 야복나루를 건너기 전날 밤에 어떤 존재와 밤새도록 씨름을 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그게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천사라고 우리가 해석을 해야 되겠습니다. 근데 그 하나님의 사람이 야곱을 힘으로는 이길 수 없게 되었는지 결국에는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내리쳤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내리쳤다 하는 것이죠. 번역본에 따라서 야곱이 다친 부위에 대한 표현이 조금씩 다르기는 합니다. 옛날 개역한글에서는 여러분들에게 아주 익숙한 용어죠, '환도뼈'를 쳤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환도뼈는 엉덩이뼈를 말하는 것이죠. 오늘 읽은 성경에는 허벅지 관절이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또 새번역 성경이나 현대인의 성경 같은 것을 보면 엉덩이뼈 또는 엉덩이 힘줄 그렇게 번역을 해놓고 있습니다. 하여튼 뼈가 탈구가 되었든지 고관절이 부러지거나 문제가 생겼다고 하는 것은 야곱이 그 이후로는 힘을 쓸 수 없는 단계가 되었다 하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야곱의 극심한 불안과 형 에서 근데 이렇게 심하게 다쳤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그 사람,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를 끝까지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야곱의 상태, 야곱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매우 불안한 상태이고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는 갈팡질팡한 그런 상태였다고 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잠시 후에 20년 전에 자기의 속임수와 거짓말로 속아 넘어가고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형 에서를 만나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0년이 지났어도 그 잘못한 것, 속였던 것, 사기쳤던 것, 아버지까지 속였던 그것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죠. 죽을 때까지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형 에서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동생 야곱 아니겠습니까.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이스라엘'과 '브니엘' 그러는 중에 여명이 밝아왔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즉 하나님의 천사가 야곱에게 "이제 나로 하여금 가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특이한 표현이지요.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인데 이렇게 보내 달라고 하는 요청에 대해서 야곱이 답변을 합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축복해 달라는 거예요. 그리고는 계속 대화가 이어집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앞으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로 불릴 것이다." 그랬더니 야곱이 다시 묻습니다. "당신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왜 내 이름을 묻느냐?" 대답을 하지 아니하고 그 사람, 하나님의 천사는 야곱을 축복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야곱은 그곳 이름을 (야복나루 아닙니까) 브니엘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하는 뜻이 되겠습니다. 지난주일날 베델, '엘'이 하나님이라 말씀드렸잖아요. 브니엘, '엘'도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얼굴'. 여기 브니엘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여 놓았습니다. 창세기 32장 30절 말씀이지요. >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존되었다 함이더라. > 이 비슷한 장면이 20년 전에도 있지 않았습니까. 형 에서를 피해서 어머니의 도움으로 외삼촌 라반의 집 하란으로 가게 되다가, 한 3일 거리 떨어진 곳에서 돌베개를 삼고 자다가 꿈을 꾸고 천사가 하늘과 땅을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고 드디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땅을 너에게, 네 자손에게 주겠다" 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 아버지 이삭에게 하셨던 약속이 이제 손자요 아들인 야곱에게까지도 들려지게 되었습니다. 축복을 받은 거지요. 꿈에서 깨어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는 뜻의 '베델'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집 베델이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얼굴 브니엘과 대비가 되기도 합니다. 20년 전에는 '하나님의 집 베델'이라고 하는 지명이 야곱 때문에 탄생했다고 한다면, 20년 후에는 야복나루터에서 '하나님의 얼굴 브니엘'이라고 하는 지명이 또한 야곱 때문에 탄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란에서의 20년과 야곱의 거부(巨富) 그 20년 동안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짐승들을 치는 목동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이에 라반 외삼촌의 두 딸을 부인으로 얻었고, 이 두 딸들의 몸종들인 빌하와 실바를 또 부인으로 얻었고, 부인이 넷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아들 11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에 얻은 아들이 요셉이죠. 물론 막내가 따로 있습니다. 베냐민, 베냐민은 그 이후에 얻은 아들이기 때문에 이때까지는 11명의 아들이 되겠습니다. 하란에서 외삼촌 라반의 재산을 관리를 하면서 자기 이름 그대로 속임수를 썼는지 어떤 수단 방법을 강구했는지 삼촌 가축이 대부분 야곱의 소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30장과 31장에 따르면은 20년 동안 머물면서 이렇게 큰 부자가 된 과정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라반과 야곱 사이에 정당한 품싹 계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 조건은 무엇이었느냐. 정상적인 짐승들은 다 라반의 것이고, 희귀하고 변종에 해당이 되는 점이 있고 아롱지고 얼룩진 것들은 야곱의 몫으로 한다 하는 계약 조건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이해가 되지 않는 그런 방법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야곱은 꾀를 내 가지고 라반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야곱의 뜻대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니까 처남들이 야곱을 비난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자기 아버지 재산을 야금야금 빼앗아 간다는 것은 자기들의 재산을 축내는 것과 똑같기 때문에 비난할 수밖에 없어요. 거기다가 장인이고 외삼촌인 낯빛도 변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아, 이제는 떠나야 되겠구나.' 하란에 머물기가 어렵게 되었다고 판단을 하고 가족과 일꾼들과 가축을 끌고 고향 브엘세바로 가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400명의 사병과 극심한 두려움 아주 큰 부자가 되어서 고향 땅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자식도 많고 부인도 많고 재산도 엄청난데, 이 야곱의 생각을 짓눌르고 있는 걱정거리가 큰 게 하나가 있었습니다. 고향을 가면은 20년 전에 그렇게 헤어진 형 에서를 만나야 된다고 하는 크나큰 부담입니다. 형 에서가 20년 전에 자기를 때려죽이려고 달려들었었는데 여전히 그럴 것인지 아니면 받아줄 것인지 그게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대비하기 위한 그런 조처를 취하는데 그 이야기가 창세기 32장 앞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형 에서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일꾼들을 보내 가지고 이렇게 전했습니다. "형님, 저는 외삼촌 라반과 지내면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근데 이제는 형님 도움으로 고향 땅에서 살려고 돌아왔습니다." 이런 내용의 전갈을 일꾼들을 통해서 형 에서에게 전했습니다. 그리고는 기다리고 있는데 일꾼들이 돌아와서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당신의 형 에서가 400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당신에게 오고 있습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너무 겁나는 그런 전갈 아닙니까. '아, 때가 왔구나. 20년 전에도 죽을 뻔했지만 이번에야말로 내가 형 손에 죽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400명의 사람들, 부하들을 데리고 있었다 하는 것은요, 아브라함도 그랬지만 그때 당시에는 개인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은 사병, 개인이 운영하는 병사들을 데리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 숫자가 400명이나 된 거예요. 현재 우리나라 군대로 보면 대대급이 한 600명 정도 된다고 하니까 그거보다 좀 못 미치기는 하지만 엄청난 사병을 에서가 거느리고 지금 동생 야곱에게 오고 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32장 7절에 보니까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했다'고 그런 심경을 표현을 해놓고 있습니다. 심히 두렵고 답답했다. 20년 전에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었던 하나님의 약속이 자기에게도 주어지게 되니까 그는 "두렵도다, 두려운 곳이여"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부른다고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근데 오늘의 두려움은 그때 두려움하고는 다른 차원이에요. 그때는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이었지만, 지금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하는 큰 뜻보다는 자신의 목숨만이라도 구해 보고자 하는 그런 반응에서 나오는 두려움. 이게 에서의 400명 군사를 보고 또는 전해 듣고 가지게 된 야곱의 상태였습니다. 야곱의 계산: 무리를 나누고 대규모 예물을 보내다 야곱은 어쨌든 꾀가 많은 사람입니다.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사람이 '이 위기를 어떻게 모면할까.' 일단 일꾼들하고 가축들을 두 대대로 나누었습니다. 에서의 사병들에 의해서 한쪽이 공격을 당하게 되면 다른 쪽이라도 살려두어야 되겠다고 하는 판단인 것이죠. 그리고는 형 에서에게 줄 예물을 챙기기 시작을 했습니다. 예물, 뇌물에 모든 사람들이 다 약하죠. 저도 그럴 거예요. 근데 이 에서에게 줄 이 예물의 양이 어마어마해요. 성경이 그 숫자를 다 기록을 해 놓았습니다. 암염소가 200마리, 순염소가 20마리, 암양이 200마리, 순양이 20마리, 어미 낙타 30마리와 그 새끼 낙타들, 암소가 40마리, 황소가 10마리, 암나귀 20마리, 새끼 나귀 10마리. 암컷들이 훨씬 많죠. 그건 동물의 세계니까 그런 것이죠. 이 예물의 가치가 얼마나 될까. 현재의 돈 가치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 제가 언젠가도 한번 이에 대한 언급을 한 적이 있다고 기억이 나기는 합니다. 그때 제가 얼마라고 말했는지 기억은 안 나요. 근데 여러분, 다른 동물들은 다 빼놓고서라도 낙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낙타, 여기 어미 낙타가 30마리라 그랬어요. 그리고는 그에 딸린 새끼 낙타들 마릿수는 안 나왔지만 새끼 낙타들도 딸려 있었어요.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런 나라들 가면은요, 낙타 경주를 해요. 옛날에는 몸무게가 적게 나가는 소년 같은 사람들을 등에 태워 가지고 누가 더 빨리 달리나 이 경주를 주인들이 옆에 그냥 자전거를 타고 엄청나게 같이 달리면서 경주를 하는 그런 낙타 경주가 있어요. 우리에게는 생소한 경주이지만 거기서 우승을 하거나 잘 달리는 낙타들은요, 마리당 1억 이상이 가는 거예요. 가격이 낙타 한 마리가 1억 이상이 된다는 거예요. 여기 보면 어미 낙타가 30마리에요. 그냥 뚝 잘라 가지고 1억 원이다 하면 낙타 가격만 현재 가치로 30억 원. 예, 새끼 낙타까지 합치면 더 넘겠죠. 기타 동물까지 다 합치면요, 소도 암소가 40마리고 수소가 10마리예요. 암나귀가 20마리고 새끼 나귀가 10마리예요. 그러니까 그냥 어림잡아 계산을 해 봐도 수십억 원 넘지요. 수십억 원 넘지. 자기 재산 전체는 아니겠지만 형 에서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준비한 예물의 가치가 현재 가치로 따지면 그 정도 되었다 하는 거, 이거는요 당시의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재산량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왕이나 영주가 가질 수 있을 만한 그런 재산, 또는 조공을 바치거나 외교적 화친을 위해서 보낼 수 있었던 거대 재산에 해당될 만큼의 재산을 형 에서를 위해서 준비를 했다. 형과의 화해를 위해서 과감한 투자를 했다라고도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게 해놓고는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창 32:20) 야곱이 생각, 계산이 그렇게 섰다 하는 것이죠. 홀로 남은 야곱과 져주시는 하나님 야복나루를 건널 만한 인간적인 방법은 다 동원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내들과 열 아들을 먼저 건너가게 했습니다. 드디어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밤새도록 하나님의 사람과 씨름을 했다고 하니까 야곱이 야복나루에 거한 때는 밤이든지 어둑어둑 저녁이든지 그럴 것입니다. 밤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을 연약하게 만듭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강을 건널 것인가, 아니면 나 혼자라도 살아야 되겠다 해서 다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돌아가야 될 것인가.' 생각이 매우 복잡했습니다. 그런 심각한 고민의 순간에 사람이 나타난 거예요. 그리고 날이 새도록 야곱과 그 사람이 씨름을 했습니다. 천사인지 어떤 존재인지 나와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천사라고 보통은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망가뜨렸습니다. 환도뼈를 내리쳤습니다. 움직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도 야곱은 끝까지 이 하나님의 사람을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심각했다 하는 거예요. 그만큼 야곱이 간절했다라고 하는 뜻으로 해석을 해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자 그 하나님의 사람이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을 줍니다.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라고 하는 뜻의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사람들과도 겨루어 이겼지만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거예요. > 야곱이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긴 사람 야곱, 이제 이름이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근데 여러분, 어떤 인간이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길 수 있습니까.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지요. 그렇다고 성경이 거짓말을 쓴 것은 아니에요. 이 성경의 기록의 행간을 우리가 좀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절실하게 매달리는 한 사람, 환도뼈가 부러졌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사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아니하는 한 사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치사하게 이길 수는 없는 거예요. 저주셨다는 말입니다, 저주셨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신 줄 믿습니다. 아멘. 저주시는 분이에요. 이런 하나님을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구약의 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요나예요, 요나.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너 저기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내 말을 전해라.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설 수 있도록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요나는 똑똑한 사람이에요. 신앙도 깊었다고 볼 수 있어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너무 잘 알고 있었어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안다고 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것 아닙니까. 요나서 4장 2절에 보면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어요.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 '내가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저들이 회개를 하면 저들을 멸망시키겠다고 하는 생각조차도 거두어들이실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요나는 잘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니느웨 가기를 죽기보다 더 싫어했습니다. 도망치다가 다시스로 도망치다가 큰 물고기에게 삼켜져 가지고 뱉어져서 다시 가기는 했지만, 가서도 불평불만이 '내가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할 정도로 하나님의 이 속성에 대해서 요나가 불평을 터트리지 않았습니까. 자비로우신 하나님, 결국에는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제 나를 가게 내버려 달라"고 할 정도로 야곱은 끈질기게 달라붙었는데 하나님이 저주신 것이죠. 여러분, 여러분 가정에 어린 자녀들이 있는데 아빠가 그 아들하고 팔씨름을 해요. 치사하게 끝까지 이기는 아버지 있어요? 있는 힘을 다해 가지고 애 뼈가 부러지든지 말든지 그냥 손목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있는 힘을 다해 가지고 그냥 탁 해 가지고 "이겼다!" 하고... 그건 아버지가 아니죠. 아버지 심정은 그런 게 아니다라는 거예요. 엄마도 마찬가지죠. 엄마는 더하죠. 엄마는 거짓말까지해가면서 자녀들을 보호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비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죠. 하도 쫓아와 가지고 귀찮게 하니까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재판관이 이 과부의 청을 들어준다 하는 그 말씀이 들어 있지 않습니까. 단독자로서의 고독과 '브니엘의 아침' 그만큼 야곱이 절박한 상태였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야곱만 그런 게 아니에요. 모든 인간들이 다 비슷합니다. 야곱이 곧 우리라는 거예요.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오게 되어 있고, 누구에게나 절대 고독의 순간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카이로스의 때가 오게 되어 있다. 홀로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 하나님과의 관계라 하면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서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 야곱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수많은 사람들과 친교를 하고 대화를 하고 그렇게 재밌게 살아도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는 홀로 서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 야곱이 곧 우리라는 거예요. 꼭 육체의 죽음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야복나루의 야곱처럼 여러분들도 절대 타자이신 전능하신 하나님과 씨름하듯이 있을 수밖에 없는 때가 있다 하는 것이죠. 하나님을 깊게 체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하는 브니엘로 부르기 시작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있는 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이름도 없으신 분이시죠. 우상들과 다른 분이에요.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로 불렀다고 하는 것은, 또 야곱이 하나님과 대면했다고 하는 이 말씀은요, 하나님을 깊이 체험했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체험했다고 하는 뜻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하나님을 직접 그 얼굴을 만약에 있으셔서 뵈었다 하면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밑바닥으로 체험한 야곱. 실제적으로 형이 400명의 군사를 끌고 온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일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이야기,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졌다는 이야기예요. 이게 누구든지 하나님 체험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은요, 생명을 만난 거예요, 생명. 생명의 근원을 만난 겁니다. 여러분 모두가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성숙한 신앙인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비록 환도뼈를 부러뜨려서 절뚝거리고 걷고 있지만 브니엘의 아침이에요. 몸은 그렇게 상했지만 그의 영혼은 하나님을 뵈었어요. 생명을 만난 거예요. 어쩌면은 에서를 만나 가지고 죽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 만난 것으로 만족한 거예요. 그게 브니엘의 아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이다." 요한복음 14장 9절,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야곱이 했던 체험을 바울도 했다는 거죠. 하나님의 얼굴을 본 거예요. 그 빛을 보았다, 생명의 빛을 보았다. 결론: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축복 오늘 평화통일주일 예배입니다. 조용히 생각해보면 우리 남북이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되는 극적인 변화가 없이는 어떻게 되겠는가 두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결국에는 그렇게 두려워했던 에서 형을 만납니다. 그 장면을 창세기 33장 3~4절, 또 넘어서 10절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야곱은 맨 앞으로 나가서 형에게로 가까이 가면서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 그러자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끌어안았다. 에서는 두 팔을 벌려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서 입을 맞추고 둘은 함께 울었다. > (10절) 형님께서 저를 이렇게 너그럽게 맞아 주시니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합니다. > 남북이 이래야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평화를 이루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 평화를 위해서 살아가며 또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시는데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우선입니다. 그런 체험 속에서 사랑과 화해와 평화의 삶을 살아가는 일을 위해 기도하고 애써 헌신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 자비하신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평화통일주일을 맞이하여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또 에서까지 언급을 해 보았습니다. 이 둘이 결국에는 만나서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남북이 이렇게 화해할 수 있도록 주님 길을 열어 주옵시고, 우리의 힘으로는 되지 않겠사오니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야곱이 하나님을 대면한 것처럼 생명의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먼저 이룰 수 있도록 성령 충만함으로 채워 주옵소서. 이 나라와 민족을 보살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김성회장로 2026-08-13 18:48:58
묵상기도 — 「브니엘의 아침」 자비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야곱이 얍복 나루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홀로 하나님 앞에 섰던 것처럼, 우리도 삶의 두려움과 걱정과 계산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안에도 야곱처럼 과거의 잘못과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모습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하고, 내 힘과 지혜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며, 하나님보다 현실의 어려움을 더 크게 바라볼 때가 많았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야곱이 허벅지 관절을 다쳐 더 이상 자신의 힘을 의지할 수 없었을 때에도 하나님을 붙들었던 것처럼, 우리도 어려움 가운데 주님을 더욱 굳게 붙들게 하옵소서.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고백했던 야곱의 간절한 믿음을 우리에게도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에게도 브니엘의 아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어둠과 두려움 속에서 생명의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고, 절망 가운데 소망을 발견하게 하시며, 상처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몸과 환경이 완전히 변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을 만남으로 새롭게 변화되게 하옵소서. 주님,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신 것처럼 우리의 삶도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사랑의 삶으로, 두려움에서 믿음으로, 미움에서 용서로, 갈등에서 화해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특별히 평화통일주일을 맞아 우리 민족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오랜 분단과 대립 속에 쌓인 불신과 상처를 주님께서 치유하여 주시고, 남과 북이 서로를 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한 민족으로 바라보게 하옵소서. 야곱과 에서가 서로 끌어안고 함께 울었던 것처럼 우리 민족에게도 화해와 평화의 날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먼저 우리 자신부터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내가 먼저 손을 내밀게 하시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과 이해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갈등을 더하지 않고 평화를 이루게 하옵소서. “평화를 이루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답게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며, 평화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오늘도 우리의 삶 가운데 브니엘의 아침을 열어 주시고, 어둠을 지나 빛으로, 두려움을 지나 믿음으로, 갈등을 지나 화해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생명이 되시며 평화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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