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와 회복으로 자라는 교회

주일공동예배

과연 '여기' 계시거늘
2026-08-03 15:31:39
청주제일
조회수   97

*말씀봉독 : 창세기 28장 10절-22절

*말씀선포 : 과연 '여기' 계시거늘

댓글

김성회장로 2026-08-05 20:28:59
[성경 봉독: 창세기 28장 10~22절]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 성경 창세기 28장 말씀입니다. 창세기 28장 10절부터 22절까지 말씀을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흙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 아멘. 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설교 본문] 오늘 믿음으로 예배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예배 전체를 통하여 또 들려지는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들의 믿음이 더욱 풍성해지는 복된 시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구약 성경 창세기를 보면 특별히 족장들의 이름들이 등장하고 또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내용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주로 나와 있는 내용들이죠. 다양한 느낌으로 읽을 수 있는 내용들이고 또 한편으로 보면 인간적으로 흥미진진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대표적인 족장이 아브라함이고, 또 그의 아들 이삭이고, 또 그의 손자인 야곱으로 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아브라함의 증손인 요셉도 족장 반열에 끼워 주기도 합니다. 이 요셉을 어떻게 4대 족장으로 언급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는 제가 다른 시간에 한번 더 말씀으로 작성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족장들이 있는데, 이 여러 명의 족장들 가운데에 그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좀 더 많이 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의 주인공인 야곱이라고 하는 인물이 되겠습니다. 야곱처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는 것도 야곱 이야기를 읽으면서 들게 되는 생각 중에 일부가 되겠습니다. 또 야곱 이야기가 이렇게 마음에 걸리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야곱, '야코프'라고 하는 발음으로도 이름을 말할 수 있겠는데,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어머니 리브가의 뱃속에서 쌍둥이 중 둘째로 태어난 인물 아니겠습니까? 그 '야코프'라고 하는 이름 자체가 남의 발뒤꿈치를 잡는다, 남을 괴롭힌다, 남의 등을 친다, 또는 뒤통수를 친다, 훔친다 이런 뜻이 들어 있는 이름이 야곱이라고 하는 인물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야곱처럼 남의 뒤통수를 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인생살이와 비슷한 우여곡절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야곱이기 때문에 다른 족장들보다도 더 많이 신경이 쓰이고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많은 족장이라고도 생각을 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이 야곱 이야기가 창세기 25장에 어머니 리브가가 해산하는 장면부터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0절부터가 이 야곱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내용들이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르기까지 야곱이 어떤 일을 벌였느냐 하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장자권이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위상이지요. 장자권 거기에다가 장자만이 가질 수 있는 축복권이 함께 주어지게 되어 있는데, 야곱은 형 에서의 장자권과 축복권을 빼앗은 사람이지요. 혼자서 한 일은 아닙니다. 야곱을 더 사랑했던 어머니 리브가의 편애 때문에 이루어진 현상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장자권과 축복권을 빼앗긴 형 위해서는 야곱을 그냥 둘 리가 없습니다. 죽일 듯이 달려들었을 것이고, 자칫 잘못하면 둘째 아들을 잃을 것이고, 또 자칫 잘못하면 첫째 아들마저도 등지게 되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 어머니 리브가는 지혜를 짜내어 둘째 아들 야곱을 자신의 친정 땅인 하란 땅으로 피난 가도록 합니다. 그 내용이 이제 오늘 본문에 기록된 내용이 됩니다. 브엘세바를 떠나서 밭단아람 지역인 하란으로 야곱이 가게 되었다 하는 배경이 됩니다. 우리가 흔히 이스라엘 땅, 팔레스틴 땅을 남북으로 이야기할 때에는 북쪽 단에서부터 남쪽 브엘세바까지 그렇게 표현을 합니다. 단은 북쪽 끝에 있는 지역이고 브엘세바는 남쪽 끄트머리입니다. 그러니까 이삭이 브엘세바를 근거로 생활을 했다 하는 이야기이죠. 그리고 야곱과 에서가 그곳에서 태어났다 하는 말이 되겠습니다. 바로 이 브엘세바에서 밭단아람 지역인 하란으로 야곱이 피난을 가게 됩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서쪽 도시인 어머니 리브가의 친정이 있는 곳, 하란 땅입니다. 물론 이 하란 땅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잠시 거쳐 지나간 땅이기도 합니다. 여기 브엘세바에서 하란 땅까지는 보통 한 800km 정도 떨어진 것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스페인에 있는 산티아고 순례를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데, 산티아고 순례길의 풀코스가 약 800km 정도가 되거든요. 프랑스 어느 지점에서 스페인 저 북단에 있는 산티아고까지, 지금 야곱이 그 정도 거리를 출발을 했다 하는 말씀이 됩니다. 빨리 걸으면 20일 정도 걸리고 늦게 걸으면 한 달 정도 걸리는 거리가 되겠습니다. 야곱이 혼자 출발을 했는지, 또 무엇을 챙겨서 가져갔는지 성경은 이런 반구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냥 상상을 해 보면, 아버지 이삭이 농사도 짓고 유목 생활도 했습니다. 농사를 짓기만 하면 아버지 이삭은 100배 소출을 거두었다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씨를 뿌려서 추수를 할 때에 30배, 60배, 100배를 거둔다라는 말씀을 주셨는데, 예수님 당시나 이 야곱 당시나 100배 소출을 거두었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이삭은 늘 풍년을 구했던 인물이었다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부자였다는 이야기죠. 아버지 아브라함의 재산도 물려받았고, 우물도 물려받았고, 농사지을 때마다 100배 소출을 거두는 부자였습니다. 그러니 그때 이삭이 야곱이 이렇게 도망을 갈 때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지 않습니까. 집안 살림을 누가 했겠습니까? 당연히 어머니 리브가가 전적인 책임을 지고 집안 살림을 이끌어 갔을 것입니다. 형 위해서는 사냥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집안에 있지를 않아요, 늘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이니. 그러니 어머니 리브가가 정말 사랑하는 아들 야곱을 친정으로 피난을 보낼 때 절대 빈손으로 출발하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옆에서 돕는 하인들도 붙여 주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달 거리를 예상하고 먹거리도 충분하게 챙겨 주었을 것이라고 상상을 해 보게 됩니다. 이건 저의 순전한 상상입니다. 근데 성경에는 그런 기록은 나와 있지 않아요.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야곱이 여행길을 떠난 지 며칠째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광야 들판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잠자기 위하여 적당한 돌을 베개 삼아 누웠습니다. 밤하늘에 쏟아지는 무수한 별빛 아래에서 꿈을 꾸었습니다. 꿈 내용이 오늘 본문 12절부터 15절까지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땅과 하늘로 이어지는 사닥다리가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땅과 하늘을 이어주고 있는 그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천사는 또 사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반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늘과 땅을 이어놓은 이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했다고 하는 이 표현은 참 적절한 표현이라고도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드디어 하나님께서,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겠다." 여기 아브라함은 조부라 하고 이름이 붙어 있는데, 이삭은 아버지라고 하는 표현 없이 그냥 이삭이라고 되어 있는 게 특징입니다. "내가 누워 있는 땅을 너뿐만 아니라 네 자손에게도 주겠다." 지금 야곱이 누워 있는 땅은 고향 땅인 브엘세바에서부터 한 90km 떨어져 있는 옛 지명으로는 루스라고 하는 땅이 되겠습니다. 이 루스가 이제 야곱의 어떤 꿈 이야기와 결부가 되면서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는 뜻의 '벧엘'이라고 하는 지명으로 바뀌게 되지요. 우리는 보통 쉽게 벧엘, 벧엘 그렇게 발음하지만 원래 발음대로 하려면 '엘'이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두 단어가 합쳐져서 벧엘이 된 거죠. 베스-엘, 집-하나님, 하나님의 집 벧엘이 되었다 그런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 야곱에게 주신 약속, 땅을 너와 네 자손들에게 주겠다고 하는 이 약속은 이미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에 하나님께서 하셨던 약속입니다.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허락하겠다, 네가 밟는 것을 다 네 땅으로 해 주겠다, 뿐만 아니라 너를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요 세 가지 내용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의 큰 줄기입니다. 근데 그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셨고 그의 아들 이삭에게도 물려졌던 이 약속이, 이제는 장자권을 빼앗기는 했지만 야곱에게도 그대로 물려지고 있는 장면이 오늘 본문에 들어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15절에 보면 야곱 개인에게도 약속을 하십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킬 것이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고 내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늘 너와 함께하겠다고, 하나님께서 야곱과 언제나 함께하겠다는 약속도 해 주셨습니다. 민족 단위로서의 약속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야곱 개인에게도 이런 귀한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이것도 제 상상이지만, 지금 쫓겨서 도망가고 있는 처지에 있는 야곱에게 이런 하나님의 약속이 먼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브엘세바에 살면서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애지중지 귀염을 받다가, 지금 허벌판에 던져진 그런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란에 있는 외갓집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지도 잘 몰라요. 설령 하란까지 간다 할지라도 외갓집 식구들이 '야, 네가 야곱이구나, 우리 여기서 시집을 간 리브가의 아들이구나' 하고 알아볼지도 잘 몰라요. 미래 삶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도 없는 그런 상태에서 꿈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거예요. "내가 너를 항상 지켜 주겠다." 이런 생존의 위기에 떨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야곱이 꿈속에서만이라도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을까. 여러분, 꿈 이야기는 길게 하지 않겠습니다. 꿈 이야기가 그저 우리의 일상생활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의 꿈 이야기는 거의 없어요. 거의 일상생활과 관련 있는 내용에 근거해서 꿈이 꾸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이야기는 야곱도 비슷하다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하란 땅으로 가고 있는 야곱이지만, 브엘세바에서 부모님과 함께 생활을 할 때 얼마나 자주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 아버지 이삭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 그런 이야기를 각인이 되도록 얼마나 자주 들었겠습니까. 그런 야곱에게 지금 이 루스,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꿈속에서 하신 말씀으로 여기 성경은 기록을 해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평소에 많이 들었을 야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중에도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약속이 야곱의 영혼의 양식이 되었고, 야곱의 마음판에 새겨져 있었고, 야곱의 영혼 안에 이러한 축복과 약속이 각인되어 있었다라고 해석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보통 때는 이런 게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좋을 때는 기억이 잘 안 난다는 거예요. 그런데 힘들고 고달플 때, 외로울 때, 몸이 너무 아플 때, 나에게 고통과 고난이 주어질 때 "아, 그랬지! 할아버지에게 하셨던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 지금 눈이 잘 보이지 않지만 아버지 이삭이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말씀..." 꿈속에서지만 야곱이 그것을 듣고 "아, 그랬었지, 그랬었지..." 바로 하나님의 그 축복의 말씀이 꿈을 통해서 들렸다라고 해석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나 여호와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언제나 너와 함께 하겠다." 이런 유의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의 말씀은 이런 구약 성경의 족장들의 삶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러분 모두에게도 "나 여호와 하나님이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너를 지켜 주겠다" 하는 이 약속이 여러분의 것이고, 여러분들의 신앙에 이어져 있다고 하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드디어 야곱이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야곱이 했던 이 놀라운 고백은 하나님 체험이라고 할 때 하나님 체험의 본질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어떤 것인가요?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체험한다고 할 때에 이 야곱이 고백한 이 내용은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 되겠습니다. 오늘 제목이 탄생한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 고백은 하나님 체험의 본질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쉬운 표현으로 두 가지만 확인할 수가 있겠습니다. 첫 번째 내용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기'라고 하는 지명은 구체적으로 볼 땐 야곱이 누웠던 루스 땅 그 광야 장소를 가리키는 표현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믿음의 눈을 크게 뜨고 이 말씀을 읽게 되면, '여기'라고 하는 이 말씀은 근본에서 보면 모든 곳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여기'라는 말을 빼고 '모든 곳'이라는 말을 대입시켜 보면 이렇게 읽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호와께서 과연 모든 곳에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나님께서는 여기 계실 뿐만 아니라 모든 곳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어요. 또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때도 없어요.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시고 하나님은 어느 때나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간혹 보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도 하나님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니 너희들 속에 있다, 네 마음 속에 있다. 하늘나라가 그렇다" 하는 것을 말씀하셨죠. 이렇게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특별한 장소에서만, 특별한 때만 계시는 분이라고 한정 지어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그런 경향성을 가지고 있지요. 보통 이 예배를 드리는 예배당을, 또 이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이런 경향성이 더 큰 경향성으로 나타난다 하는 것을 볼 수가 있겠죠. 지금 지구상에는 성전은 없습니다. 서기 70년에 로마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에 유일하게 있었던 성전은 완벽하게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아니하고 다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없어요. 교회당, 예배당은 예배를 드리는 장소입니다. "여호와가 바로 여기에 계시다"라고 하는 야곱의 이 고백을 따르면 들판도 성전이요, 예 찬송가 가사처럼 초목도 성전이요, 궁궐도 성전이요,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인 거예요. 그게 구별되지 않아요. 그게 바로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모든 곳에 계시다"라고 하는 아주 중요한 개념이라고 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소부재. 없을 무(無) 자에 바 소(所) 자에 아니 불(不) 자에 있을 재(在) 자.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신 하나님, 어느 때나 계시지 않는 때가 없으신 하나님. 그 개념이 바로 오늘 야곱이 잠에서 깨어나서 한 말 속에는 들어 있는 개념이다 하는 거예요. 성경 시편 139편 7절로 10절에 보면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라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예레미야서 23장 24절에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천지에 충만하신 하나님. 이게 지금 야곱이 잠에서 깨어나서 했던 고백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공간과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특별히 이 내용은 무슨 범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그 주장하고는 전혀 다른 내용이에요. 범신론이라는 게 뭡니까. 나무에도 신이 있고 돌에도 신이 있고 부엌에도 신이 있고 화장실에도 신이 있고 뭐 이런 생각이 다 범신론 아닙니까. 범신론하고는 다른 거예요. 하나님은 온 세상에 계셔서 우리 가운데 피조물 가운데 내주하시는 것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온 세상과는 구별되어 계시는 초월적인 존재가 하나님이시다 하는 겁니다. 그리고 언제나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특별히 고난 중에 있을 때, 너무나도 아플 때, 외로울 때에 하나님은 우리들이 있는 그곳, 그 시간, 그게 어느 곳이든지 어느 때든지 늘 함께 계시면서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시다. 그게 여러분들이 믿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늘 위로가 충만하고 평안이 충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코람데오 언제나 어느 곳에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게 바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의미가 되겠습니다. 두 번째 내용은 그겁니다. 모든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 하는 아주 중요한 개념인데, 이 야곱은 여기에 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하면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야곱은 알지 못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야곱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의 삶 자체가 다 그런 것 아닙니까. 일상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놓칠 때가 너무 많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말하고 내 마음대로 행동하고 거짓말도 하고 정직하지 못하고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죠. 왜 그러냐, 하나님 체험보다도 온갖 걱정거리에 휩쓸려 있다든지, 또는 내가 관심 있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든지, 나에게 흥미를 주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든지 하면 이 하나님의 체험은 잘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야곱이 바로 그랬습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야곱처럼 하나님이 '여기' 아닌 모든 곳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몰라요. '그런 체험 없어도 세상을 재밌게 사는데, 또 내 뜻대로 살아가는 데 별 지장이 없다'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요. 하나님의 체험의 깊이를 모르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죄요, 죄인의 모습이요, 안타깝다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큰 잔치 비유를 주셨습니다. 큰 잔치를 베풀기 위해서 거의 1년 전에 이미 잔치에 참석할 사람들 초대장을 다 발송해 놓은 상태입니다. 1년이 지났습니다. 종이 가서 초대장 받은 사람들한테 "오늘이 바로 큰 잔칫날이니 오시오" 그랬더니, 땅을 산 사람은 "나는 땅을 샀기 때문에 못 가겠습니다", 소를 산 사람은 "소를 돌봐야 되기 때문에 못 가겠습니다", 1년 동안 장가간 사람은 "부인을 기쁘게 해 주어야 되기 때문에 못 가겠습니다"라고 핑계를 대었습니다. 하나님 체험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이 바로 이 짝이다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큰 잔치와 같은 하나님의 체험이 무엇이길래 우리가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을 해야 되느냐. 야곱이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는데도 미처 몰랐다고 하는 사실을 고백한 다음에 자신의 특별한 깨달음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영적인 현상입니다. 17절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두렵도다 이것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많은 걱정거리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면 기뻐하며 소리를 지르고 환호하면서 그렇게 춤을 추는 게 마땅할 것 같은데, 야곱은 두렵다고 토로를 합니다. 무엇이 이렇게 야곱을 두렵게 만든 것일까요? 깊은 산속을 걷다가 사람을 만나면 너무 놀라지 않습니까? 여기에 두려움은 그런 종류의 두려움이 아닙니다. 의학적으로 "당신은 3개월밖에는 살 수 없습니다"라는 의사의 진단도 무서운 이야기입니다만, 그런 두려움하고는 다른 두려움이에요. 야곱이 했던 이런 두려움을 종교 용어로는 '오토'라고 하는 사람이 이름을 지어 놓았습니다만, 우리 교인들은 자주 들었던 용어입니다. '누미노제(Numinose)', 그것은 일반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거룩한 두려움. 요즘 도시에서는 밤하늘에 별 보기가 쉽지 않은데, 여기 이 두려움과 비슷하다고 여길 수 있는 두려움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한적한 시골에서 은하수가 쏟아지는 것처럼 경험한 장면을 지켜볼 때 느낄 수 있는 전율 비슷한 두려움이 비슷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여러분,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별이 3광년 떨어져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별들이 수천억 개가 모여 가지고 쏟아지는 것처럼 하늘에 촘촘히 박혀 있는 곳이 은하수, 밀키웨이입니다. 은하수. 그런데 우주 공간에는 그런 은하수가 수천억 개나 더 존재한다고 해요. 수천억 개나. 그것도 그냥 수천억 개지 몇 개인지 정확히 모르는 거예요. 거시 세계를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거룩한 두려움에 해당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거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두려움뿐만 아니라, 미시적인 세계에서도 우리를 두렵고 아찔하게 만드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의 경외와 경건과 전율과 놀라움과 두려움이 늘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그걸 잘 몰라서 그렇지요.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인 마틴 하이데거라고 하는 사람이 '사중자(四重者)'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을 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용어인데요, 한자로 쓰면 저렇게 씁니다. 사중자, 뭘 네 가지를 얘기했느냐. 땅을 이야기하고, 하늘을 이야기하고, 신적인 존재들을 이야기하고, 필멸자(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이 존재를 그냥 사중자라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이데거는 이 사중자는 서로 흩어져 있는 게 아니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니고, 마치 서로 얽혀 있는 것처럼 뒤엉켜 있는 존재들이다. 이 이야기는 뭔 줄 아십니까. 특별히 신적인 존재들과 필멸자인 인간 세계는 서로 얽혀져 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저 멀리 하늘에만 계시는 분도 아니고, 멀리 동이나 서에 계시는 분도 아니고, 바닷속에 계시는 분도 아니고, 하나님은 우리 인간 생활 속에 얽혀져 계시는 분이시다. 이게 하이데거가 말하고 있는 사중자의 개념입니다. 그거죠. 우리 일상의 삶에 우리들이 거룩한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 그런 현상들은 무지무지하다는 겁니다. 그거를 잘 캐치해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예술가들이에요. 예민한 사람들입니다, 예민한 사람들. 이런 궁극적인 실체 앞에서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나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에 대한 각성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가끔 인용하는 내용이지만 또다시 인용을 합니다. 1990년 2월 14일, 미국의 무인 탐사선인 보이저 1호가 지구로부터 60억 km 정도 떨어져 있을 그때에, 이 계획을 기획했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라고 하는 사람이 60억 km 떨어져 있는 지구를 뒤돌아보아서 촬영을 하라고 지시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찍은 사진, 여러분들이 기억하실 만한 사진이죠. 저 동그라미가 60억 km 떨어진 뒤편에서 찍은 지구입니다. 보이지도 않아요. 이게 이제 뭐 흐리기도 하지만 우리가 거기서 살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칼 세이건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 사진을 접하고는 전율을 합니다. "We are here. 우리가 여기 지금 살고 있다." 그러면서 동명의 저서를 통해서 이런 말을 남겨 놓았습니다. 짧은 내용입니다만 저 점을 다시 보십시오. > "저것은 우리의 고향이자 우리 자신입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 당신이 아는 모든 사람, 당신이 들어본 모든 사람,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오만함, 우리의 자도취, 우리가 우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는 환상은 저 창백한 푸른 점 하나로 인해서 전지전능한 도전 앞에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행성은 저 감싸 안는 우주의 암흑 속에 외로운 하나의 점일 뿐입니다. 이 광대한 어둠 속에서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구할 도움은 다른 어디에도 없습니다." > 이게 제가 축약해서 표현한 내용입니다만, 지구는 인간에게는 우주의 전부이지만 광활한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거시적인 안목에서 보면 수많은 먼지 중 하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냐 하는 것을 강조해 주고 있는 사진 한 장이지요. 저도 그렇고 여러분들도 그렇고 얼마나 나약합니까. 정상 체온이 36.5도인데 여기서 34도만 떨어져도 저체온증으로 의식을 잃습니다. 거기에서 한 23도만 높아지면 장기가 손상되고 생명을 잃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인간의 나약함이에요. 태어나자마자 걷지도 못합니다. 무슨 이 살갗이 두껍고 또 뭐가 물어도 잘 뚫리지 않을 만큼 튼튼한 살갗도 가지지 못한 게 인간이에요. 환경의 영향도 엄청나게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보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 자체는 약하기 때문에 살아남은 존재에 가깝다고 해도 틀리지 않겠습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이것은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지능을 발전시키고 도구를 만들고 서로 무리 지어서 협력하는 문명을 이루어 낼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나약함이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함을, 우리의 죄 때문을 인지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비하하는 게 아니에요. 서로 돕고 연대해야 되는 이유를 깨닫게 해 주는 중요한 시각이 됩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처음으로 제자를 부르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물을 깁고 있을 때 예수님이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내리라." "아이구, 밤새도록 소득이 없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말씀이니까 한번 해 보겠습니다" 가서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거기 잡힌 고기의 숫자에 관심이 많아요. 백쉰세 마리, 153 모나미 볼펜. 그 153이 거기서 나온 숫자예요, 모나미 153. 오병이어의 기적, 5천 명이 먹고도 남은 그 빵과 물고기에 관심을 가집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 거기에만 관심이 있지요. 아니에요. 더 근본적인 것은 그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것, 하나님께서 계시되었다고 하는 것, 이게 중요한 내용인데 그거는 다 빼버리고. 그때 시몬 베드로가 엎드려서 호소를 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거룩한 체험을 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야곱이 "두렵도다 이것이여",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체험한 적이 있습니까?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하고 말했다가 예수를 만난 뒤에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이 말씀은 야곱의 하나님 체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루어졌다고 하는 그 중요한 말씀이에요. 여러분,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예수님과 관련된 모든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하는 것이죠. 그게 생명입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여러분 곁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성도들을 보십시오. 거룩한 체험입니다, 그게. 거룩한 체험이 엄청난 기적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고, 우리 일상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너무나도 많다는 것. 매 순간 그러기 때문에 기쁘고 감사하고 감격스럽고 두렵기도 한 이 삶을 오늘 말씀을 받는 여러분들의 삶의 내용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마무리 기도] 자비하신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과연 하나님은 이곳에, 여기에, 또 모든 곳에 계시고 어느 때나 계시는 분이시지만, 우리는 놓치고 살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거시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미시적인 측면에서도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지켜 주시고, 끝까지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더운 여름 계절 잘 지내게 하시고, 또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 이 믿음을 잘 지켜 나가기로 다짐하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김성회장로 2026-08-05 20:34:05
창세기 28장 10~22절 본문을 바탕으로 한 설교 **"과연 여기 계시거늘"**의 세부 내용 정리입니다. 1. 설교의 배경: 야곱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도피 * 야곱이라는 인물의 의미: '야곱(야코프)'이라는 이름은 '남의 발꿈치를 잡다', '남의 뒤통수를 치다/속이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족장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중 인생의 우여곡절이 많아 우리 모습과 가장 닮아 있습니다., * 도피의 전말: 어머니 리브가의 편애 속에서 형 에서의 장자권과 축복권을 빼앗은 야곱은 형의 분노를 피해 외가(하란)로 도망치게 됩니다., * 외롭고 아득한 피난길: 브엘세바(이스라엘 최남단)에서 하란(메소포타미아 서쪽)까지는 약 800km에 달하는 먼 거리로, 한 달가량 외로이 걸어야 하는 생존의 위기 길입니다., 2. 루스(벧엘) 광야에서의 환상과 하나님의 약속 * 사닥다리 환상: 광야 들판에서 돌을 베개 삼아 자던 중,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닥다리 위에 하나님의 사자(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꿈을 꿉니다., * 두 가지 차원의 약속: * 민족적 계승 약속: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주셨던 '땅'과 '자손', '복의 근원'에 대한 약속이 장자권을 잇게 된 야곱에게 계승됩니다. * 개인적 임마누엘 약속: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고,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인격적 보호를 약속하십니다. * 내면화된 말씀의 부활: 평소 부모에게 들었던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의 말씀이 심령에 각인되어 있다가, 가장 고통스럽고 외로운 극단의 순간에 꿈(환상)을 통해 선명하게 체험됩니다., 3. '하나님 체험'의 두 가지 본질 ① "하나님은 '여기(모든 곳)'에 계신다" (무소부재, 無所不在) * 야곱이 고백한 '여기'는 그가 누웠던 광야 한복판(루스)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장소나 시간은 없다는 진리를 뜻합니다., * 하나님은 공간에 매이지 않으십니다. 특정 신전이나 성전 건물에만 한정되는 분이 아니며, 우리가 고난과 아픔 가운데 서 있는 모든 일상의 자리에 함께하십니다., ②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인간의 무지와 눈띔) * 하나님은 늘 함께 계셨으나, 야곱은 걱정거리와 자기 중심적 관심사에 매여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하나님을 체험하고 나면 일상의 시각이 완전히 달라지며 영적 각성이 일어납니다. 4. 거룩한 두려움(누미노제)과 연약함의 각성 * 거룩한 두려움(Numinose): 하나님의 현재를 체험한 야곱은 단순한 공포가 아닌, 거룩한 경외심과 전율에 사로잡혀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 인간의 연약함 인지: * 거대한 우주 공간 속 작은 먼지와 같은 존재(창백한 푸른 점)이자, 체온 몇 도 차이에 목숨이 위태로운 나약한 인간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 스스로의 죄와 연약함을 인정하는 고백("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의 고백)이야말로 참된 영적 체험의 표시입니다. 5. 결론 및 신앙적 적용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체험: 신약 시대에 예수님은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가 되어 주셨습니다. * 일상 속 벧엘 체험: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체험은 거창한 기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성도들, 매 순간의 소소한 일상 속에서도 충분히 만날 수 있습니다. * 날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의식하며(코람데오), 위로와 평안 속에서 정직하고 기쁘게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댓글쓰기 권한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