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와 회복으로 자라는 교회

주일공동예배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026-08-25 14:59:31
양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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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장로 2026-08-29 06:00:59
​[설교 원문 요약] ​성경 본문: 마태복음 14장 22절~33절 ​설교 제목/주제: 의심을 버리고 믿음을 가질 것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을 잡는 삶) ​1. 서론: 거짓말과 신앙 [02:04] ​목회자의 정직성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며, 요한복음 8장 44절을 인용하여 거짓은 본래 악마(마귀)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밝힙니다 [03:29]. ​신앙적으로 거짓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은총을 잃게 하며, 하나님은 완벽함보다 정직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04:34]. ​2. 순교의 조건과 다산 정약용 가문 [05:31] ​순교의 3가지 기준: ​진리와 신앙을 증거하는 죽음 [09:00] ​무저항과 자발적 수용 [09:16] ​박해자에 의한 죽음 [09:50] ​다산 정약용 가문 이야기: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10명의 순교자를 배출하고 가문 전체가 신앙을 지킨 사례를 소개합니다 [11:34]. ​다산 정약용이 《천주실의》를 읽고 **"눈이 환하게 열리는 체험"**을 한 것처럼, 신앙은 어둠(죄/절망)에서 빛(진리/구원)으로 들어가는 과정임을 설명합니다 [15:25]. ​3. 본문 강해: 게네사렛 호수의 풍랑과 베드로 [17:40] ​밤 사경(새벽 3~6시) 게네사렛 호수에서 제자들이 돌풍을 만나 고난을 당할 때,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오셨습니다 [18:10]. ​제자들은 두려움에 유령이라 소리쳤으나, 예수님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9:11].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 예수께 가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들 때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으며, 예수님은 즉시 손을 잡아 구원하셨습니다 [20:38]. ​4. 의심과 두려움의 근원, 그리고 지옥의 개념 [22:09] ​두려움과 의심: 인간은 건강, 재물, 직업 등 유한한 일상의 것들에 목숨을 걸 때 궁극적 확실성이 없어 두려움과 의심에 빠집니다 [24:41]. ​지옥의 의미: 지옥은 단순한 사후 공간이 아니라 **"희망이 없고 영혼·심장이 경직된 상태"**를 의미하며, 두려움과 의심 자체가 곧 내면의 지옥입니다 [31:35]. ​5. 결론: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을 잡는 삶 [36:09] ​베드로가 물에 빠졌을 때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잡아주셨듯, 삶의 풍랑과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손을 붙잡는 것입니다 [36:16]. ​배에 있던 사람들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듯이 [36:57], 성도들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을 꼭 잡고 의심과 두려움을 극복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 것을 권면합니다 [37:56].
김성회장로 2026-08-29 06:02:38
청주제일교회 > 말씀과 찬양 > 주일공동예배 주일공동예배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026-08-25 14:59:31 양제신조회수 28 댓글 김성회장로 2026-08-29 05:59:38 (공동예배 설교 원문)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은 신약성경 마태복음 14장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4장 22절부터 33절까지 말씀을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날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아멘." > 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오늘 성령 강림의 13번째 주일을 맞아서 말씀을 받는 여러분 모두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살리시는 생명의 음성이 충만하게 들려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우리가 살다가 보면 자주난 아니지만 거짓말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 많이 있을 수도 있겠고 또 아예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1부 예배 시간에도 물어본 겁니다만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이건희 목사는 거짓말을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대답하기 참 곤란하시죠? 목사한테 거짓말쟁이라고 할 수도 없고 안 했다고 하기에는 좀 찜찜하고. 근데 한 번도 안 했습니다. 한 번도 안 했다고요. 하늘을 우러러 한 번도 안 했습니다. 아이고 진짜 오늘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거짓말을 합니다. 어제까지는 기억이 안 난단 말이에요. 요한복음 8장 44절을 보니까요, 예수님께서 악마에 대해서 언급을 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그가 거짓말을 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는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이다." 악마, 마귀에 대해서 거짓말쟁이고 또 거짓의 아비다라고 하는 그런 표현을 사용을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거짓말 그러면 '말' 자가 붙어 있기 때문에 이게 단순한 말의 문제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신앙적인 측면에서 보면 거짓말을 한다고 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되는 그런 결과를 맺게 되어 있다라고 정리를 합니다. 거짓말을 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다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찾으실 때에 완벽한 사람을 찾으실까요?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찾으실 때에는 정직한 사람들을 찾으신다, 믿으시나요? 예, 정직한 사람을 찾으신다. 실수를 할 수도 있고 또 때로는 넘어질 수도 있지만 거짓으로 자기 자신을 포장을 한다면 그 거짓은 누구로부터 오는 것이냐? 예수님의 판단은 마귀, 악마로부터 나오는 것이다라는 그런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성경을 배경으로 하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 거짓말을 할 줄 몰라 가지고 죽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세상 속에도 있을 수 있겠지만은 우리 교회 역사 속에서 보면 그런 사람들을 순교자라고 평하기도 합니다. 조선 말기에 천주교를 신봉하다가 수많은 가족들이 순교를 당한 집안이 있어서 좀 잠깐 소개를 하려고 합니다. 이에 앞서서 먼저 순교라고 하는 이 용어에 대해서 가끔 제가 정리를 해 드리지만 다시 한번 좀 정리를 잠깐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순교라고 하는 것은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일이요, 더 넘어서서 순교는 나보다 주님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러니까 내어 주고 비우고 먹히고 죽는 삶이 바로 순교의 삶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물론 개신교의 역사 가운데에서도 순교 역사는 많이 있지만은, 그러나 우리 청주제일교회가 자리한 이 자리가 가톨릭 교인들의 순교의 터전이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 좀 찾아보려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가톨릭의 천주교회 역사는 그 기점을 1784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에 비해서는 100년 앞서는 일이죠. 이 1784년에 이승훈이라고 하는 분이 중국의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을 합니다. 그러고는 이벽이라는 사람, 권신일이라는 사람들과 함께 명례방 공동체를 만들면서 한국 천주교회가 시작이 됩니다. 여기 명례방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의 명동성당을 가리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길지 않은, 유럽에 비해서 길지 않은 역사이지만은 순교자가 1만 여 명 정도 나왔습니다. 성인 반열에도 100명이 넘는 성인들이 탄생이 되었습니다. 성인은 아무나 시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교황이 이제 허락을 해야만이 되는 것인데, 이렇게 스스로 복음의 진리를 수용을 했고 또 100년이 넘게 지속된 아주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온 순교의 역사는 가톨릭이든 개신교를 넘어서서 크나큰 자랑거리라고 볼 수가 있겠죠. 여러분, 순교자를 판단을 할 때는 분명한 기준이 있다는 이야기를 몇 차례 드렸습니다. * 첫 번째, 그냥 죽음이 아니고 신앙과 진리를 증거하다가 죽는 죽음일 때의 순교라고 합니다. 근데 이거 하나만 충족된다고 순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함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 절대적으로 폭력을 사용한다든지 무력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무저항으로 그 죽음을 받아들일 때 순교의 두 번째 요건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 그리고 세 번째는 이 신앙과 믿음과 교회를 증오하는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박해를 당하고 죽어야만이 순교 반열에 들어설 수 있는 거예요. 요 세 가지, 진리 때문에 죽어야 되고, 또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무저항으로 죽어야 되고, 세 번째 그 죽음이 기독교를 심각하게 박해하는 자들의 손에 의해서 죽을 때, 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면은 순교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요. 옛날에는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는 그런 뜻으로 '위주치명' 그렇게도 표현을 했어요. 전주에 가 보면 이 순교자들의 산이 있는데 그 산 이름을 '치명자산'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자, 조선 말기에 이처럼 순교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 집안에 대해서 좀 여러분들에게 소개를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은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님 집안이 되겠습니다. 그 도표를 보시면은 그 집안의 가계도가 저렇게 네모 박스 처리가 된 분들이 다 순교자들이에요. 네, 다산 정약용 선생님 집안에 순교자가 저렇게 많았다는 거예요. 순교자가 10명이나 나왔습니다. 다산 정약용 형제가 사남일녀 집안인데요, 물론 아버지가 부인이 두 분이 있어서 첫째 부인으로부터 제일 큰형이 태어났고 나머지 부인으로부터 삼남일녀가 탄생이 됐습니다. 첫째 아들 정약현입니다. 이 사람이 이씨 성을 가진 여성과 결혼을 했는데 이씨 성의 동생이 누구냐 하면은 바로 그 유명한 이벽이라고 하는 사람이에요. 이벽이라고 하는 사람은 한국 천주교 전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입니다. 천주교 교단을 결성했고 자생적으로 정착하는 데 크게 기여했던 인물이 이벽이라는 사람이에요. 첫째 아들 정약현의 딸이 정명련인데 이 딸도 유배를 당하고요, 그 사위가 그 유명한 황사영입니다. 황사영의 백서 해 가지고 첫째 아들의 사위가 백서의 주인공 황사영이고 처남이 이벽이에요. 이게 첫째 아들 집안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가 정약전, 유배를 당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아들이 정약종인데 이분은 복자로 순교를 당하고 그의 부인 유체칠리아도 성녀로 순교를 당합니다. 그의 세 자식들이 다 순교를 당합니다. 정철상, 정하상, 정정혜. 정철상도 복자고 정정혜도 성녀가 됩니다. 그리고 이 정하상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을 때 성인 반열에 올라서게 돼요. 정하상. 그리고는 정약용, 유배를 당하죠. 그리고 딸 이름은 정씨 그렇게 돼 있는데, 이 정씨가 누구랑 결혼을 하느냐 하면은 순교한 이승훈이라고 하는 사람과 결혼을 해요. 이승훈이라고 하는 사람이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입니다. 세 명이 유배 생활을 하고 10명이 순교를 하고 자녀손들을 포함해 가지고 그중에 성인이 한 명 탄생하고 복자가 세 명, 성녀가 두 명이나 탄생한 집안이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님 집안이다. 대단한 집안이죠. 그중에 이 셋째 아들 정약종 집안은 아예 직계손이 딱 끊어졌습니다. 다 순교를 당합니다. 이런 집안이 우리나라의 기독교 역사에 흔치 않은 게 아니라 아예 없다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중에 정약전이라는 분은 흑산도 유배를 가 가지고 유명한 《자산어보》를 기록한 분이 아니겠습니까. 자, 이 중에 다산 정약용이 아까 말씀드렸던 이벽으로부터 《천주실의》라고 하는 책을 전달을 받고 읽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느낌을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은, 《천주실의》를 읽고서는 "눈이 환하게 열리는 느낌을 얻었다" 그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눈이 환하게 열렸다. 마치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로마서 1장 17절의 의미를 깨닫고 천국문이 열리는 체험을 한 것처럼, 다산 정약용도 바로 《천주실의》를 읽고는 눈이 환하게 열리는 체험을 했다고 기록을 해 놓았습니다. 여러분들이 다산 정약용이 표현을 했던 '눈이 환하게 열렸다', '어두웠던 것이 빛으로 변했다'라고 하는 이 표현은 철학이든 문학이든 역사든 특히 우리 개신교 역사에서는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은유에 속하는 표현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기독교 신앙 가운데에서 어둠은 죄를 의미하고 죽음을 의미하고 절망을 의미하고, 빛은 진리를 의미하고 구원을 의미하고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지 않습니까. 이 빛 자체가 영원한 생명과 구원이 아니라 그것을 상징하는 개념으로 빛을 사용하고 있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바로 다산 정약용이 표현을 했던 어두움의 빛이라고 하는 게 종교 개혁의 중요한 모토요 종교 개혁의 도시였던 스위스 제네바의 시정 목표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성경 내용이 바로 이 폭풍과 바람과 파도의 어둠으로부터 빛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서 인생 여정이 뒤바뀐 사람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이 게네사렛 호수입니다. 제자들을 먼저 배를 타고 건너편에 가라고 하시고는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고 계셨을 때에, 이미 육지로부터 수 리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이 돌풍 때문에 심각한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을 예수님이 보셨습니다. 그때 시각은 밤 4경이었습니다. 새벽 3시부터 6시 사이를 4경이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 새벽 3시, 4시, 5시, 6시 이때에 깜깜할 때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이 갈릴리 호수에서 늘 접할 수 있는 돌풍을 만난 거예요.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그런 심각한 어려움을 맞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기도하시다가 그 장면을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호수 위를 걸어오셨다고 오늘 성경이 기록을 해 놓았습니다. 보통 일이 아니죠. 어떤 사람이 물을 걷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니까 제자들이 유령이다 하면서 두려워하며 소리치고 난리가 났습니다. 자신들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실체를 꿰뚫어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공포였습니다. 돌풍 때문에도 놀라 죽겠는데 지금 누가 물 위로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이니 당연히 유령이다라고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는지, 베드로가 이 성격이 급한 베드로, 항상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 아닙니까. 이번에도 또 먼저 나섰습니다. "당신이 유령이 아니고 주님이시라면은 나더러 물 위로 걷게 해 주십시오." 그런 요청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요청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워낙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예수님도 걸으시니 나도 걸을 수 있겠다 생각했던 것이라고도 볼 수가 있겠죠. 예수님이 "오라" 하셨습니다. 나에게로 오라. 베드로가 물에 뛰어들었습니다. 근데 강력한 바람이 불고 또 호수가 요동을 치고 하니까 무서워서 점차적으로 물에 빠져 가지고 허우적대기 시작을 했습니다. 평생을 이 게네사렛 호수,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 생활을 했던 베드로였기 때문에 수영이나 이 호수의 변화에 대해서는 베테랑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점차적으로 물에 빠져 가기 시작을 했습니다. 실제적으로 물에 빠졌다는 개념이지만 해석해 볼 때는 그만큼 베드로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처한 상황이 극한적인 어려움에 속해 있었다라고 해석을 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물에 빠져 가면서 베드로가 소리를 쳤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이제 핵심적인 내용이지요.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 예수님만이 구원자라고 하는 소리를 베드로가 그 상황 속에서 했던 겁니다. 이게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 아니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만이 나의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다, 예수님만이 나의 구원자이십니다라고 외칠 수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믿음이 필요한 것인데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 주고 있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그리고는 함께 배에 오르시매 바람이 그쳤다. 예, 오늘 내용의 대체적인 줄거리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믿음이 작았기 때문에 베드로가 의심한 것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묻겠습니다. 믿음이 크면 의심하지 않나요? 믿음이 크신 청주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의심을 조금도 하지 않나요? 의심하지 않고 살아가신가요? 불가능합니다. 의심이 조금도 없는 상태는 전혀 불가능합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신앙생활을 처음 한다든지 기적을 체험하고 믿음 생활에 들어온다든지 교회 생활을 신나게 시작할 때는 의심이 없다가도 오늘 베드로처럼 어려운 일을 만나면은 의심하게 되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거예요. 처음에 호기롭게 나섰던 베드로가 바람과 파도를 보고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 모습입니다. 여기 베드로가, 그리고 배에 탔던 제자들이 근원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고, 유독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그때 당시의 제자 모두, 크리스천들, 그리고 초대 교회를 향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왜 의심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핍박이 주어진다고 왜 의심하느냐. 힘들고 어렵다고, 신앙생활 하기 어렵다고 왜 의심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베드로에게만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제자들 전체, 당대의 초대교회 모든 교인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교회 공동체에게 하신 말씀이고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하신 말씀이다라고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다. 왜 의심하고 두려워할까요? 어려운 표현을 쓰면 궁극적인 확실성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궁극적인 확실성을 가져다 주지 아니하는 것에만 목숨을 건다는 거예요. 일상에 목숨을 걸고, 건강에, 직업에 목숨을 걸고,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자식들에게 목숨을 걸고, 돈에 목숨을 걸고. 이 모든 것들은 궁극적인 확실성을 우리에게 주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또 시간과 더불어서 없어지고 사라지고 빠져나가고 해체될 것들뿐입니다. 하나님 외에 모든 것이 다 유한할 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 유한한 것들에게 목숨을 걸고 살고 있으니까, 이렇게 궁극적인 확실성을 주지 못하는 것에 목숨을 걸고 있으니 항상 두려워하고 두려움 끝에는 의심을 하게 된다 하는 말씀입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과 깊이 맞물려 있습니다. 누구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마태복음 10장 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라. 그러니까 우리 모든 인간들의 걱정과 두려움은 전체가 다 이 '몸'에 대한 것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를 휩쓸고 있는 모든 어려운 문제는 바로 이 몸에 관한 것들과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이 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강력한 두려움 아니겠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죽기 직전까지 몸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가 최종적으로 이 몸의 죽음에 대한 가장 강력한 두려운 문제 때문에 어떻게 할 줄 모르고 살다 가는 게 우리 인생 아닌가 하는 생각이에요. 그러니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운명론적으로, 숙명론적으로 이러한 현상들을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또 주변에 보면 이러한 숙명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그렇겠고 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인들, 제가 목사니까 목사들도 그런 방식으로 교인들을 위협하기도 합니다. 위협하면서 어떤 대상들을 철저하게 혐오하게 만들고 심리적인 죄책감에 떨어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지난 금요일부터 재판이 시작이 됐는데 신천지의 이만희 씨 재판이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무정당에 억지로 가입을 강요하는 그 문제 관련해서 첫 재판하고 보석 심문이 있기도 했습니다. 풀어 달라고, 보석 허락해 달라고 전방위적으로 신천지 할 것 없이 인권 단체까지 동원해 가지고 난리입니다. 정당성을 갖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여러분들, 1970년대에 있었던 미국의 끔찍한 사건을 기억하고 계시나요? 인민사원 사건이라고요. 1950년대 미국 인디애나주에 있는 교주 짐 존스라고 하는 사람에 의해 인민사원이 탄생을 합니다. 근데 이 사람이 처음에는 인권 운동, 인종 차별 반대, 빈민 구제, 평등주의 내세우면서 흑인과 소외 계층들에게 아주 큰 지지를 받았습니다. 교세가 커지니까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가지고는 이제는 정치적인 영향력까지 행사할 정도로 이 집단이 커졌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자신을 신격화하고 재산을 갈취하면서 교인들을 억압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런 소식들이 알려지니까 정부가 조사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랬더니 77년도에 신도들을 이끌고 남미의 가이아나 밀림 속으로 이주를 해 가지고 자신들만의 공동체인 존스타운을 형성했습니다. 강제 노동을 시키고 폭행을 하고 감금을 하고 심각한 인권 유린이 벌어지게 되니까 하원의원 리오 라이언이라고 하는 사람이 취재진하고 피해 가족들을 이끌고 찾아갔습니다. 일부를 데리고 나오는데 총격을 가해 가지고 하원의원까지 포함해 5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총격 사건 직후에 짐 존스는 미국 정부의 보복이 임박했다고 하며 신도들을 모아 가지고 '혁명적인 자살'(자신들의 표현입니다)을 부추겼습니다. 청산가리, 신경안정제 등을 섞어서 과일맛 음료 '플라보에이드'라고 하는 것을 마시도록 강요를 합니다. 모두 918명이 사망하는 끔찍한 결과가 빚어졌습니다. 2001년도 9·11 테러 사건 이전에 미국 사람들이 제일 많이 죽은 최대 사건이 저 인민사원 사건입니다. 918명이 사망한. 전통적인 교리를 부정하고 자신을 우상화하고 또 설교 도중에 성경책을 집어던지면서 "종이로 된 성경을 믿지 말고 살아서 너희를 구원할 나를 믿어라" 협박하고 위협하고. 이 지옥의 문제를 가지고도 그럴 수 있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하는 이 말씀 속에서 '지옥에 멸한다'라고 하는 이 말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것이냐, 그 방향에 따라서 우리 신앙관이 바로 잡힐 수도 있고 이상하게 흘러갈 수도 있다는 거예요. 지옥이라고 하는 상황은 희망이 없는 상황이면 지옥입니다.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다 그런 개념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희망이 없는 상황은 지옥의 상황입니다. 지옥에서는 영혼이 희망이 없는 상황에 떨어지게 됩니다. 지옥에서는 영혼이 경직된 상태로 있게 됩니다. 그게 지옥입니다. 여러분들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을 했지요. 원래 이 사도신경 안에는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사" 이렇게 넘어가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음부에 내려가셨다가—음부, 그게 지옥이라는 말이에요—음부에 내려가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셨다, 이게 원래 사도신경의 원판입니다. 여기에 음부라고 하는 말, 히브리어로는 '스올'이라 말하고 헬라어로는 '하데스'라고 하는 이 표현을 우리나라 말로 음부 또는 지옥이라고 번역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근데 왜 우리나라 사도신경에는 이 표현이 빠졌느냐. 사실은 1894년도 사도신경에는 옛날 표현으로 "디옥에 내리사" 그렇게 돼 있어요. 그러다가 1887년도에는 요게 또 빠졌다가 1905년도에는 다시 들어갔다가, 1908년도부터는 아예 이 표현이 다 삭제가 돼 가지고 오늘날까지 우리의 사도신경에는 이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하는 표현이 사라진 상태로 신앙 고백을 하고 있지요. 여러분, 이 표현은 어떻게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실 수 있느냐 그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죽음의 환경까지 철저하게 내려가셨다고 하는 그 표현이에요. 그리고 부활하신 거죠. 근데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 거기에만 초점을 맞춰 가지고 이것은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고 또 신실하지도 못한 표현이라고 특별히 감리교회에서 이것을 강력하게 주창을 합니다. 감리교회 창시자 웨슬리가 이것을 주창을 했기 때문에 1908년도부터는 아예 우리나라 개신교회에서는 이 표현을 들을 수가 없고 신앙 고백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여기 지옥으로 떨어지게 됐다, 영혼이 경직된 상태에 놓여 있으면 지옥이요, 심장이 굳어 있는 상태도 지옥입니다. 바로의 마음이 완고하다든지 완악하다든지 이게 다 심장이 굳어 있는 상태예요. 어리석은 부자가 창고를 지어 놓고 즐겨야 되겠다 마음먹을 때 그 마음 상태가 심장이 굳은 상태, 영혼이 굳어져 있는 경직된 상태, 그 마음이 지옥이에요. 그러니까 지옥은 멀리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에요. 천국이 우리 속에 있는 것처럼 지옥도 우리 속에 있는 것이다, 믿으십니까? 지옥이 그런 개념이에요.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주셨을 때에 두려움하고 의심이 바로 그런 지옥의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믿어야 되고, 왜 믿음이 적은 자가 됐느냐 그런 책망을 들어야 되는 것이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느냐 그거죠.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그 해결책을 유일하게 제시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서 베드로를 붙잡으셨다. 예수님이 내미시는 손을 붙잡을 때 이 문제는 해결된다는 뜻입니다. 해결의 실마리가 거기에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언제나 우리가 예수님께 붙잡힌 바 되어 살아갈 때에 지옥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전적으로 예수님을 의존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천국의 삶이다, 이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복된 내용입니다. 바로 배 속에서 죽을 지경에 놓여 있던 이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본문 33절이 신앙 고백을 합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새번역이 번역하기를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에게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선생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꽂혀 있는 거예요. 두려워 의심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손을 내미시고, 저들에게 두려움을 떨쳐내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결국에는 그 믿음의 고백 "당신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스도십니다"라는 고백을 하도록 우리를 이끄는 말씀이 오늘 본문이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언제나 손을 내밀고 계시다고 하는 것을 늘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손을 내미시는 그분이 어떤 예수님이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부활하신 예수님이세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손을 붙잡는다고 하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움이 어디 있습니까?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왜 미워하겠습니까? 왜 믿음 없이 살아 가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을 꼭 붙잡으시고 한 주간 더 승리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고 주님 말씀하셨사오매, 오늘도 이 말씀에 힘을 얻고 세상 살아가면서 부활하신 주님의 손을 붙잡고 의심하지 아니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주님과 동행하며 영생의 삶을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우리 청주제일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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