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와 회복으로 자라는 교회

주일공동예배

긍휼의 하나님
2026-09-01 16:33:17
청주제일
조회수   37

*말씀봉독 : 로마서 11장 29절-36절

*말씀선포 : 긍휼의 하나님

댓글

김성회장로 2026-09-06 09:39:28
2026년 8월 30일 청주제일교회 공동예배 설교(로마서 11:29-36) 전문 요약입니다. [설교 개요] * 설교 제목: 긍휼의 하나님 * 본문 말씀: 로마서 11장 29절~36절 * 영상 링크: https://youtu.be/4GUX-Wfm5gk [설교 내용 상세] 1. 본문 봉독 및 '올래(來)'자 십자가의 의미 * 성경 봉독: 로마서 11장 29절~36절을 봉독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며 모든 이에게 긍휼을 베푸신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 오라(來)의 십자가: 송병구 목사의 도자기 십자가 작품(한자 '올 래(來)'자 형상)을 소개합니다. 이 십자가는 차별과 구별 없이 "누구든지 오라"는 복음의 초청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벽이 무너졌음을 상징합니다. * 십자가의 이중성: 본래 십자가는 극악무도한 심판의 도구이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연결과 구원의 은총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2. 김대건 신부와 오반지 바오로의 순교와 신앙 * 김대건 신부의 처형과 복음 선포: 한국 최초의 가톨릭 신부인 김대건 신부의 새남터 형장 처형 기록을 소개합니다. 김대건 신부는 죽기 직전 "하나님을 위하여 죽으니 영원히 살 것이요, 영원한 복락을 얻으려면 기독교 신자가 되시오"라고 선포하며 죽음을 뛰어넘는 구원의 십자가 신앙을 고백합니다. * 오반지 바오로 복자와의 연결: 병인박해 때 순교한 오반지 바오로의 "만 번 죽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 없다"는 고백을 언급합니다. 이들의 신앙 고백과 아래턱뼈 안치 의미를 통해, 십자가의 죽음이 구원의 역사를 일으킴을 강조합니다. 3. 잃어버린 십자가 정신과 율법의 한계 * 분실물 센터의 성경책: 지하철 분실물 센터에서 가장 찾아가지 않는 물건 중 하나가 성경책인 현상을 비유로 들어, 현대인들이 삶 속에서 예수님과 십자가 정신을 잃어버리고 살아감을 지적합니다. * 예수님의 랍비로서의 삶과 배척: 예수님은 율법과 성경에 누구보다 박식하셨으나, 중풍병자 죄 사함 선언, 하나님과의 일체성 선포 등으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신성모독 죄목으로 배척당하셨습니다. *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 1장 1절을 인용하며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복음과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합니다. 4. 사도 바울의 복음관과 하나님의 '긍휼' * 율법의 한계: 사도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통해 율법으로는 인간이 구원을 얻을 수 없고 단지 죄를 깨달을 뿐임을 명확히 합니다. * 이스라엘과 구원의 신비: 유대인이 배척당했더라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며, 이방인의 구원 수 차오름을 통해 이스라엘도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신비로운 역사를 설명합니다. * 긍휼(Mercy)의 본질: 구원 역사의 핵심 키워드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긍휼을 뜻하는 히브리어('라함')는 자궁('레헴')과 뿌리가 같으며, 자궁이 태아에게 아무런 조건을 따지지 않고 생명을 품듯 하나님의 긍휼도 조건과 자격(인종, 성별, 신분 등)을 따지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임을 강조합니다. 5. 단테의 신곡과 현대 사회 비판 * 단테의 지옥도 해석: 단테의 《신곡》 지옥도에서 가장 깊은 곳에 배신자, 사기꾼, 위선자, 무관심한 자들이 위치한 점을 언급합니다. * 사회 고발: 이는 단순한 사후 세계의 공포가 아니라, 부패한 종교 권력, 정치적 배신, 탐욕과 불신이 만연한 당대 사회 및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비판한 거대한 사회 고발장임을 설명합니다. 6. 결론 및 권면 * 성도들 역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긍휼과 자비 덕분에 구원에 이른 존재임을 상기시킵니다. * 이웃과 타인을 향해 차별하거나 구별하지 말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닮아 긍휼과 자비의 마음으로 대하는 삶을 살 것을 당부하며 기도로 설교를 마칩니다.
@김성회장로 김성회장로 2026-09-06 09:43:05
[묵상기도문] 긍휼의 주님 앞에 서서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의 은혜 보좌 앞으로 저희를 불러주시고, 아무런 조건이나 자격 없이 품어주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누어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우리는 본래 아무런 자격도 없이 심판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으나, 십자가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신 긍휼하심 덕분에 구원의 은총을 입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태아를 조건 없이 품어 키워내는 어머니의 자궁처럼, 아무런 계산 없이 저희의 허물을 덮으시고 생명을 주신 그 놀라운 사랑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삶의 분주함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 정신을 잃어버리고 살아갔음을 고백합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자비를 말하면서도, 정작 우리의 삶과 교회 안에서는 나와 다른 이들을 선긋고, 차별하며, 구별하고 배척하지는 않았는지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주님,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우리의 짧은 생각과 계산으로 다 헤아릴 수 없는 신비임을 믿습니다. 바울 사도가 고백했듯, 주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을 바라보며 늘 겸손히 주님의 은혜를 구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긍휼)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이웃과 사회를 향해 이기적인 안위만을 챙기거나 무관심으로 방관하지 않게 하시고, 참된 자비와 긍휼로 차별 없이 이웃을 대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 힘과 의지로는 부족하오니, 오직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함께하시어 늘 긍휼과 자비의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성회장로 2026-09-06 09:40:49
2026년 8월 30일 청주제일교회 공동예배 설교의 전체 전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말씀은 신약 성경 로마서 11장 말씀입니다. 로마서 11장 29절부터 36절까지 말씀을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올해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절기 마지막 주일 예배입니다. 진심으로 말씀을 받는데 성령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우리나라에서 십자가를 수집하는 일 그리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 매우 유명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송병구 목사님이신데요. 이분이 도자기로 만들어진 한 십자가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 십자가가 바로 여러분들 화면에 보시는 저 십자가입니다. 한자로 어떤 글자일까요? 예, 올 래(來) 자입니다. 올 래 자를 도자기로 잘 구워서 표현을 했는데 그냥 한자 래 자로 끝나는 게 아니고 그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도 찾아볼 수가 있겠고요. 가운데 큰 틀은 당연히 십자가로 보이고요. 또 아래쪽에 사람 인 자가 크게 보이고 그 위쪽으로는 사람 인 자가 적게 보이고, 세 사람이 등장하며 십자가가 한가운데 서 있는 그런 모습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한자 래 자하고는 다른 신앙적인 해석이 되겠습니다. 이분이 이 십자가를 해석하면서 이거는 복음의 정신이다, 또 십자가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게 뭐냐 하면 오라 하는 것입니다. 오라, 누구든지 오라. 이거는 구별이 없는 것이고 차별이 없는 것이고 나눔이 없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높은 벽이 무너져 버린 그런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오라, 주님께로 오라고 하는 그런 뜻이 담겨 있다고 해석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자 안에 담긴 상징이 문자 자체를 뛰어넘는 복음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여기 십자가라고 하는 형상을 우리가 생각해 볼 때에 평소에도 그렇지만은 십자가는 아주 극악무도한 심판의 도구이지 않습니까. 심판의 자리가 십자가요,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십자가의 연결의 은총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십자가는 심판의 자리임과 동시에 구원의 자리다라고 하는 믿음을 모두가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십자가가 심판의 자리이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구원의 자리임을 우리도 신앙고백하지만은, 우리나라 순교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 신부이신 김대건 신부의 처형 장면, 그리고 그분이 남기신 마지막 말씀을 통해서도 십자가는 심판의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그걸 뛰어넘는 구원의 의미가 담겨 있는 십자가다라고 하는 것을 찾아볼 수가 있겠습니다. 한국 가톨릭 순교자전 자료 중에 보면 "김대건 사제 드디어 여덟 번째 칼날에 목이 끊어져 모래 위에 나뒹굴었다" 이런 제목하에 김대건 신부의 처형 장면이 자세하게 수록이 되어 있습니다. 군졸들이 신부의 손을 뒤로 돌려 매더니 새끼로 만든 가마 위에 앉혔다. 군졸들이 가마를 둘러매고 가자 군중 사이에 길이 자연히 생겼다. 노량진 근처에 있는 한강 백사장 새남터 형장에 당도하자 포도대장이 사형 선고문을 읽었다. 주인 김대건은 국경을 몰래 넘어가 마카오에 가서 외국인들과 10년 동안 상통하고 육로와 해로로 수차례 국경을 넘나들며 서학의 괴수로서 우매한 백성을 현혹하고 서양인과 상통하는 편지를 중국 어선의 선장에게 전한 것 등의 혐의로 판결을 받아 군수하노라. 이게 김대건 신부의 판결문입니다. 이 낭독이 끝나자 김대건 신부가 이렇게 외쳤다고 기록에 남겨 있습니다. "내가 외국인과 교제한 것은 우리 기독교와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한 것이었소. 나 하나님을 위하여 죽으니 영원히 살 것이요, 여러분도 영원한 복락을 얻으려면 기독교 신자가 되시오." 이게 김대건 신부의 죽기 직전 마지막 설교였고 강론이었고 복음 선포였다고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다. 여기에 십자가가 심판의 도구 자리이지만 구원의 자리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이 신부는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죽으니 영원히 살 것이요, 죽지만 살 것이요. 이게 십자가 정신이란 말이죠. 군졸들이 신부의 위옷을 벗기고, 당시에 사형 관습 중에 죄인의 두 귀에다가 화살을 꼽는 게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피가 목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두 군졸이 신부의 양쪽 겨드랑이 밑에 두 개의 몽둥이를 끼워 넣어 앞뒤로 걸어맸다. 밧줄로 신부의 머리를 동여매어 그 한 끝을 사형대로 쓸 말뚝에 끼워 잡아당기니 신부의 얼굴은 자연히 하늘을 쳐다보게 되었다. 이런 끔찍한 과정 속에서도 신부는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고 기록에 남겨 있습니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에 보면 사람의 목을 치는 사람들을 망나니들이라 그러죠. 망나니들이 막걸리를 입에 품고는 칼에다가 푹 뿜어대면서 여러 차례 목을 칠 듯이 하다가 또 돌고 칠 듯이 하다가 돌지 않습니까. 이게 망나니들이 그렇게 목을 베는 신을 하면서 돌기 시작을 하니까 김대건 신부가 그랬다고 합니다. "빨리 목을 쳐라, 어서 쳐라." 그 말에 망나니들이 놀래 가지고 돌아가면서 내려치기 시작을 했다. 그러니까 망나니가 하나가 붙은 게 아니라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결국에는 여덟 번 만에 목이 끊어져서 모래 위에 나뒹굴었다. 형리가 그 목을 주어 들고 목판에 얹어 가지고 포도대장에게 가서 맞는지 안 맞는지 진짜 죽었는지 검사를 받았다. 곧바로 궁으로 들어간 포도대장은 사형이 차질 없이 집행되었음을 보고를 했습니다. 신부의 시신은 포도대장 명에 따라 떨어진 머리를 몸체에 붙여서 또 자주빛 조끼와 무명바지를 입혀 가지고 그 자리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그리고 교우들이 파가지 못하도록 군졸들이 지키게 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김대건 신부의 처형 장면, 또 그분이 남겨 놓은 이야기들을 살펴보면서 마치 160년 전 병인박해(1866년) 때 우리 교회 이 자리가 네 분의 천주교인들이 순교를 한 자리인데, 그중에서도 맨 위에 있는 복자 오반지 바오로라고 하는 분이 처형당했던 모습을 연결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김대건 신부가 순교를 하고 40일 뒤에 한 교우가 군졸들이 지키는 허술한 틈을 타서 시신을 파 가지고 서울에서 150리 떨어진 경기도 안성의 미린내 산에다가 안장을 했습니다. 이후 1960년 한참 뒤에 서울에 있는 혜화동 가톨릭대 안에 성당으로 이장을 했습니다. 그때 김대건 신부의 아래턱은 순교 자리인 미린내에 세워진 성당에 안치를 하고, 치아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분리 안치를 했다 하는 이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오반지 바오로 복자가 순교를 당하면서 했던 말 여러분들이 기억하지 않습니까. "만 번 죽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 없어." 그 말을 남기고 순교를 당했는데, 여기 복자 오반지 바오로의 아래턱뼈를 청주 시내의 순교지 관할을 하는 우리 교회 옆 서운동성당 제대에다가 안치해 놓았다 하는 것을 제가 말씀드린 기억이 있습니다만, 바로 이 아래턱뼈를 모셨다 하는 것은 이 아래턱뼈를 움직여야 많이 말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 신앙 고백이 실제적으로는 아래턱뼈가 움직임으로 '내가 죽지만은 다시 살아난다, 만 번 죽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없어' 이 말이 구체적으로 가능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미린내 성지에 있는 김대건 신부의 아래턱뼈가 지금도 보관이 되어 있는 사진을 보실 수가 있겠는데요. 저 가운데 희게 되어 있는 곳 한가운데가 김대건 신부의 아래턱뼈를 안치해 놓은 것입니다. 어쨌든 십자가는 죽음의 도구이지만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라고 하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처음에 말씀을 드렸던 올 래(來) 자 이 십자가, 이것은 처형의 십자가를 넘어서서 구원의 의미를 담고 있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판단을 해 볼 수가 있는 것이죠. 어떤 분이 서울에서 지하철 4호선을 타고 가다가 그만 가방을 선반에 올려놓고 그냥 내리고 말았습니다. 깜짝 놀라 가지고 역 사무실을 찾아가서 방법을 문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충무로에 분실물 센터가 있으니까 거기 가서 한번 물어보라고 해서, 이분이 분실물 센터 홈페이지에 올라온 물건들 중에 자기 가방이 있는 것을 확인을 하고 가서 가방을 되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센터의 담당자가 이런 말을 합니다. "아 글쎄 요새 사람들 이런 물건을 찾아가지 않은 것이 너무 많아 가지고 골치가 아픕니다. 잃어버리고도 찾지 않는다는 거예요." 저는 초등학생들이 학교에서 뭘 잃어버려도 안 찾아간다는 얘기는 들어 보았는데, 어쨌든 성인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이 가방을 찾은 분이 궁금해서 물어보았어요. "어떤 물건을 제일 많이 안 찾아갑니까?" 하고 물어봤어요. 뭐라고 대답했느냐면 "성경책이요" 그래요, 성경책. 우산과 성경책을 제일 안 찾아간대요. 여러분, 예수님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잃어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 않습니까. 상관없이 살아가는 거 아니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신도 그러리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자주 분실물 센터에서나 찾을 수 있는 존재로 예수님이 전락하고, 또 십자가의 정신도 아예 사라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죠. 예수님은 그의 아버지가 목수였기 때문에 당신도 목수 역할을 하다가 공생애를 지내신 분이시죠. 예수님이 공생애를 지내실 때 종종 랍비라고 불렸습니다. 랍비,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식의 선생님의 개념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정교일치 시대였기 때문에 랍비는 적어도 이런 정도는 돼야만이 인정을 받습니다. 그 가장 중요한 기준이 뭐냐, 여러 가지가 있겠는데 그중에서도 구약성경의 앞에 있는 다섯 권(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토시 하나까지 빠뜨리지 아니하고 다 외울 수 있어야 됩니다. 저는 구약시대 때 안 태어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누가 랍비로 시켜 주지도 않겠지만은 어쨌든 그 외에 성경 내용들을 다 알고 있어야만이 랍비란 칭호가 가능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나사렛에 있는 회당 출입도 자주 하셨을 것이고, 또 절기 때마다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성지순례도 하신 분이 예수님이세요. 철저하게 유대인이셨습니다. 구약성경을 자주 인용도 하시고 성경에 대한 이해가 깊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서기관,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 종교 지도자들, 제사장들과 어떤 신앙적인 논쟁을 벌이시더라도 조금도 밀리지 않는 그런 분이셨다는 거예요. 독일의 토르가우라고 하는 도시를 가보면 마르틴 루터가 개신교회 중에 최초로 세워 놓은 개신교회 교회당이 있는데, 1544년 10월 5일 루터가 직접 설교를 하면서 헌당식을 집례한 교회로도 유명합니다. 이 교회를 메인 출입구를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 벽면에 설교대가 마치 새집처럼 딱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대 3면에 세 종류의 조각들이 되어 있는데, 제대를 향해서는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성에 관한 내용이 조각되어 있고, 예배당 뒤편 중층에는 당시에 헌금을 많이 했던 군주나 돈 많은 귀족들이 평민들과 구별되어 앉았는데, 그들이 볼 수 있는 장면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셔서 성전에서 재물을 팔고 돈을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채찍을 휘두르면서 뒤집어엎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한가운데 조각은 바로 예수님께서 부모님과 함께 12살쯤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셨을 때 부모님과 떨어져서 한 일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을 좌우편에 거느리고 예수님이 성경을 들고 토론을 하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서기관, 율법학자들, 제사장들에게 조금도 꿀리지 않고 성경을 가지고 토론하는 장면입니다. 말하자면 교회에서는 말씀이 가장 중심에 있어야 된다는 상징성을 드러내는 조각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성경 지식에 있어서, 또 율법에 있어서 그 해석에 조금도 밀리지 않으신 랍비 그대로의 모습이 있으셨는데, 이런 예수님께서 왜 유대교인들에게 배척을 당하셨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유대교인들, 종교 지도자들 입장에서 볼 때 신성모독죄를 지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성모독죄에 해당된다고 판단되는 내용 대표적으로 보면 마가복음 2장 5절에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당시 유대교에서는 죄 사함을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계시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것도 목수 요셉의 아들인 주제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선언이 서기관들에게는 엄청난 문제였습니다.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고 판단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이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몰려들어서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신성모독죄를 지은 사람들의 처형 방법은 투석형입니다. 돌을 던져서 죽이는 겁니다. 하나님과 내가 하나라고 하니까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치려고 했다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임을 자처도 하셨습니다. 마지막 재판 과정에서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결정적인 증언을 하셨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묻습니다. "네가 찬송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님이 답변하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그랬더니 대제사장 가야바가 성경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대제사장은 입는 옷이 특별하고 돈도 많이 드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옷인데, 가야바가 그 옷을 찢어가면서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신성모독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하면서 사형을 결의한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물론 유대 사회에서는 사형 집행권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의 사형 집행에 따라 십자가형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바로 이런 것을 알기 때문에 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기록이 된 마가복음 1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하고 선언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의 시대가 끝나고 복음의 시대가 도래했다라고 하는 선언입니다. 율법에 의해서 사형 집행을 당하셨지만 실제적으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을 통하여 복음, 모든 인간의 구원이 시작되었다, 이게 마가복음 1장 1절의 의미가 되겠습니다. 복음과 율법의 갈등, 이 문제를 가장 잘 신학적으로 정리한 사람이 사도 바울이 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해서 체계를 잡아놓은 유명한 사도입니다. 이런 고백을 주로 편지인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기록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영향을 받은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도 비텐베르크 신학교에서 주로 가르친 내용이 신약성경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집중적으로 가르칩니다. 복음과 율법의 관계가 아주 심각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율법의 근본적인 한계를 언급을 합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로마서 2장 12절). 쉽게 이야기하면 율법이 없어도 망하고 율법이 있어도 심판을 받는다, 멸망의 심판을 받는다는 개념입니다. 아무도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교에서 아무리 율법을 강조한다 할지라도 그 율법으로는 도무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의롭다 인정받을 육체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오히려 율법의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사람은 자기의 죄를 깨달을 뿐이다, 이게 사도 바울의 신앙적인 입장이 되겠습니다. 율법의 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 복음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죠. 2천 년 전에 이미. 그런데 그때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이런 질문을 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면 율법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완전히 끝장난 것이냐?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셔서 그리스도인들을 새로운 이스라엘로 선택하신 것이고, 구 이스라엘은 완전히 버리신 것이냐, 용도 폐기가 된 것이냐의 문제분입니다. 바울 시대에도 이런 내용을 강하게 주창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었어요. 어찌 보면 논리적으로, 정서적으로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메시아라고 믿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죽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히틀러가 왜 그렇게 60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학살했습니까?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라고 하는 신앙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맞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부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약성경을 배척해야 된다고 초기 시절부터 주장을 했습니다. 마르시온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주장이 초대교회 역사상 가장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또 반면에 역설적으로 뒤집어 보면 그런 이단들이 있었기 때문에 27권의 신약성경이 정경으로 채택되는 데 결정적인 촉매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이 뭐냐면 하나님을 나눠 놓은 거예요. 구약의 하나님 다르고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 구약의 하나님은 율법적이고 질투하시는 분이고 무자비하게 사람도 죽이시는 열등한 창조신(데미우르고스)이다. 반면에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내신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최고의 선한 신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구약성경은 완전히 폐기하고, 신약성경 중에서도 이방인을 우대하는 누가복음만 선택하되 율법적인 냄새 나는 것은 다 제해 버리고, 바울의 편지 중에서도 10권만 채택하되 유대교적인 냄새가 나는 것은 다 삭제해 버렸습니다. 교회사 속에서 이런 주장은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이런 흐름에 대해 사도 바울의 답변은 "아니다, 그건 아니다"였습니다. 로마서 11장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예수님도 유대인이셨습니다. 율법이 폐기됐다고 해서 사람들마저 다 버리신 것이냐, 사도 바울은 아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선언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에 이 문제는 굉장히 심각했었습니다. 바울의 입장을 정리해 보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인들이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로마서를 읽게 될 너희 그리스도인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냐.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신 것이 아니냐. 이제 복음과 믿음의 세계로 들어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충분하게 늘어나게 되면 이스라엘이 결국은 복음을 받아들일 것이다, 이게 바울의 주장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바울은 '구원 역사의 신비'라고 표현을 합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신비로운 역사예요. 그것은 무슨 계산기를 두들겨서 나올 수 있는 답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는, 구원을 향한 신비의 역사, 이게 바울이 과감하게 선포한 내용이 되겠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사람이 헤어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나님의 이 구원의 역사를 드러내는, 오늘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표현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 하나가 있습니다. 이방 그리스도인이나, 장차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져서 그것 때문에 시기를 하든 본을 받았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질 것을 희망한다 할 때 그 핵심적인 키워드가 뭐냐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긍휼 때문에 30절에도, 31절에도, 32절에도 보면 이 긍휼이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올 래 자의 십자가가 '오라, 아무나 오라, 누구나 오라, 차별 없이 오라' 그런 뜻 아닙니까.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 영어로 Mercy, 자비입니다. 누구나 다 망할 사람들이지만, 자기 고집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지만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으니 하나님이 베푸시는 긍휼함이다, 이게 사도 바울의 신앙적인 판단과 고백입니다. 성경에서 긍휼이라고 하는 용어가 학문적인 연구에 따르면 여성만의 고유한 기관인 자궁이라고 하는 개념과 뿌리가 같습니다. 긍휼이나 자비를 히브리어로는 '라함'이라고 부르는데요, 여성의 자궁은 '레헴'이라고 부릅니다. 여성의 자궁이 하고 있는 역할이 뭐냐, 태아에게 조건을 붙이지 않습니다. 뭘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무조건적으로 생명을 품고 영양을 공급하고 키워내는 공간입니다.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의 자비와 긍휼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여성이냐 남성이냐, 어린아이냐, 흑인이냐 백인이냐, 무슨 삶을 살고 있느냐 자격과 조건과 무관하게 생명을 살리고 품어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긍휼이고 자비입니다. 한국의 대부분의 기독교 교회들이 얼마나 자비롭지 못한지 항상 나누잖아요. 항상 차별하지 않습니까. 말로는 차별하지 않는다 하지만 얼마나 차별이 심한 곳이 교회인지 모릅니다. 생각이 조금만 달라도, 삶의 방향성이 조금만 나와 달라도 차별하고 배척하지 않습니까. 지난주에 제가 지옥에 관한 설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단테의 《신곡》에 보면 지옥도가 있죠. 9층까지 되어 있는 지옥도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지옥도를 자세히 보면서 '어느 누가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그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성직자로부터 시작해서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든 인간들이 다 지옥에 떨어지게 되어 있구나 그런 생각이에요. 단테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지옥을 강조하고 그때 상황을 비판을 했을까. 첫 번째, 신앙적으로 볼 때 당시에 가톨릭교회의 엄청난 권력 행사, 부의 축적, 심각한 부패 때문에 지옥을 말하는 겁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단테가 살던 곳이 피렌체였는데 교황을 지지하는 파와 황제를 지지하는 파가 심각하게 피 튀기는 싸움을 했습니다. 정치적인 배신이 판을 쳤습니다. 피렌체에서 단테는 쫓겨났습니다. 단테의 지옥 구조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단순하게 살인이나 폭력을 저지른 자들보다 사람들 사이의 신뢰를 깨뜨린 사기꾼, 위선자, 도둑, 위조범 등을 훨씬 더 깊고 고통스러운 제9지옥(제일 밑바닥 지옥)에 배치를 합니다. 당시 상업 발달로 인한 속임수와 기만이 만연해진 사회상을 고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단테는 또한 악을 저지른 사람만큼이나 선과 악 사이에서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안위만 챙기는 기회주의자, 무관심한 자들도 극도로 혐오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예 지옥 문에도 못 들어가게 만들어 놨습니다. 단테가 묘사한 지옥은 단순하게 죽은 다음에 갈 수 있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주기 위한 종교적인 장치가 아니라, 당시에 부패한 교회 기관, 끝없는 권력으로 얼룩진 정치판, 그리고 탐욕에 눈이 멀어 신뢰를 잃어버린 시민들을 비판하는 거대한 사회 고발장이 바로 단테 신곡에 나오는 지옥도라고 해석을 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어느 누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이 구원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네팔의 엄청난 자연재해,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이 어떻게 우리가 이걸 극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도대체 어떤 존재들입니까.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 때문에 구원의 은총에 들어온 그리스도인들 아닙니까. 하나님을 닮으십시오.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을 닮으십시오. 나와 다른 사람, 차이가 있는 사람 차별하지 마십시오. 구별하지 마십시오. 긍휼과 자비로 대하십시오. 이게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 사람들도 구원의 은총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오늘 선포한 핵심적인 내용이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긍휼과 자비의 사람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구원의 은총에 들어온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이렇게 받았으니 받은 사랑을 가지고 사랑하게 하시고, 긍휼을 베풀게 하시고, 자비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힘으로는 안 되겠사오니 성령께서 함께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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