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와 회복으로 자라는 교회

주일공동예배

쏟아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
2026-10-06 11:05:56
청주제일
조회수   35


*말씀봉독 : 로마서 5장 1절-8절

*말씀선포 : 쏟아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

댓글

김성회장로 2026-10-11 10:53:55
사랑의 하나님, 오늘도 저희에게 아침을 허락하시고, 주님의 품 안에서 묵상하며 한 주를 시작하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삶은 늘 주님의 쏟아부어 주신 넘치는 사랑 안에 거하고 있으면서도, 세상의 소리와 바쁜 일상에 마음을 빼앗겨 그 따스한 은혜를 잊고 살아갈 때가 참 많습니다. 때로는 환난과 시련 앞에서 주저앉고, 세상의 영광을 구하며 불안해했던 연약한 저희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주님, 오늘 이 시간 우리의 마음에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가득 채워 주시옵소서. 율법의 잣대로 서로를 재단하고 차별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원수까지도 품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차별 없는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가 마주하는 어떤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내공을 더하여 주시고, 인내와 연단을 통해 마침내 소망을 이루어 가는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소서. 땅속에 감추인 보물을 발견한 이처럼, 일상 속에서 주님 주시는 참된 기쁨을 누리며, 내 힘이 아닌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과 세상을 온전히 품고 사랑하는 신실한 삶이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김성회장로 2026-10-11 10:54:22
2026년 10월 4일 청주제일교회 공동예배 설교로, 로마서 5장 1절-8절 말씀을 바탕으로 '쏟아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주요 내용: 시대적 전환과 교육의 변화 (01:40 - 11:35): 일론 머스크가 언급한 초인공지능과 로봇 시대의 도래를 언급하며, 노동이 대체되는 미래에 학교가 단순히 지식 전달을 넘어 '함께하는 기쁨'과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는 곳으로 변화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 (11:35 - 19:40): 요한복음 17장을 인용하여, 하나님과 예수님이 사랑으로 하나 된 관계임을 설명합니다. 유대교의 제한적·선택적 사랑과 달리,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와 죄인까지 포함하는 차별 없는 사랑임을 역설합니다. 고난과 희망 (19:50 - 26:00): 사도 바울의 삶을 조명하며, 그가 수많은 환난 속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난이 인내와 연단을 통해 결국 '소망'을 이루기 때문임을 설명합니다. 성령을 통한 사랑의 채움 (26:00 - 31:28): 우리가 세상의 영광에 흔들리는 이유는 성령을 통해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사랑을 내면에 가득 채워 이웃과 세상을 사랑하는 삶을 살 것을 당부합니다.
김성회장로 2026-10-11 10:57:01
(설교 원문) 로마서 5장 1절부터 8절까지 말씀을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죄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멘. 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제 말씀을 받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통해 하늘 문이 열리는 놀라운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올해 1월 달의 다보스 포럼, 즉 세계 경제 포럼 모임에서 테슬라 최고 경영자인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일론 머스크가 이런 말을 한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 일반적인 인공지능 시대를 넘어서서 이제는 초인공지능에 의해서 운영이 되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인간의 수를 앞지를 것이고 또 이들이 인간들의 노동을 대체할 것이고 그리고는 지속 가능한 풍요의 시대가 올 것이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뭐 다른 이야기들은 다 빼놓고요. 이 초인공지능에 의해서 움직이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그러지면 인간들이 그동안에 땀 흘리고 애써왔던 노동을 대체할 것이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또 반면에 이제 이게 몇 년 뒤인데요, 2030년 때부터는 이 초인공지능 시대가 인류의 멸망을 이끄는 때가 될 것이다라고 하는 부정적인 예측도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러한 시대적인 전환기에서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이 어떻게 정립이 될 수 있겠는가, 구체적으로 학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보통 학교 생활도 잘하고 또 좋은 대학을 가든 대학 생활을 마치고 좋은 직장을 구하고 수입을 얻고 가정을 꾸리고 하는 것이 뭐 소소하지만 가장 일반적인 우리들의 바람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기초를 이루고 있는 학교에서 모든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들의 노동을 대신한다면 돈 벌기 위해서 노동하기 위해서 공부하고 배웠던 그 학교가 앞으로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어쩌면 이것이 21세기의 학교 교육의 핵심적인 질문이 될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학교 그러면 영어 단어로 '스쿨'이라고 하는 단어를 금방 떠올리지 않습니까? 근데 이 스쿨이라고 하는 단어는 그냥 생긴게 아니고 헬라어로 부터 유래가 되었는데요. '스콜레'라고 하는 헬라어로 부터 유래가 된 단어가 영어의 스쿨, 학교입니다. 이 스콜레라고 하는 이 말이 처음에는 어떤 용도로 사용이 되어졌느냐 하면은 노동, 일에서 벗어난 시간 즉 여가의 시간을 가르칠 때에 스콜레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을 하지 아니하는 여가의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까 이 여가의 시간에도 무엇을 좀 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그런 판단들을 하게 되었고 그 여가의 시간에 학문적인 토론을 이루고 또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 그런 강의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가르치게 됐다 하는 것입니다. 그 스콜레라고 하는 헬라어가 처음에는 여가 시간을 의미했는데 그 여가 시간을 이용해 가지고 학문적인 토론을 행하고 또 강의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가르치는 용어가 됐다는 것이죠. 추상적인 개념으로부터 구체적인 한 장소를 가르치는 용어가 되어서 이 스콜레가 지금의 스쿨이라고 하는 영어 단어를 탄생시켰다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당시의 헬라 시대 때에 스콜레에서 이런 그 일들을 참여하고 또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대개가 또 배움의 기회가 대개는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졌느냐 하면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자유민 남성들에게만 이런 배움의 기회가 주어졌던 것으로 알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이 사라지고 노동이 사라지는 시대가 올 것 같아요. 지금 우리 인류가 지금 상당한 혼란 속에 있기는 한데 그럴 때 그럼 우리는 뭘 할 거냐 하는 거죠. 땀 흘리고 일하는 것이 사라져 버리면 초인공지능의 로봇이 모든 것을 대행을 한다면 뭘 할 수 있을까, 그 학교 교육도 더 이상 돈 벌기 위해서 또는 직업에 필요한 지능이나 지식이나 기술을 학습하고 훈련하는데 머물지 않고 뭘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그런 질문이 가능하다라는 것이죠. 좋은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근데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인간들의 좋은 삶은 세 가지로 구성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첫 번째가 놀이를 통해서 우리 삶에서 기쁨을 경험하는 법을 배운다, 놀이를 통해서 기쁨을 누리는 법을 배운다 이게 좋은 삶의 첫 번째 내용입니다. 두 번째는 놀이를 통해서 배운 기쁨의 노하우를 나 혼자만 누리는 것이 아니고 가족이나 동료나 연인이나 또는 이웃이나 반려자와의 관계 적용함으로써 사랑의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 하는 게 두 번째 단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놀이, 사랑, 그리고 일을 우리의 인생의 삶 속에서 통합해내는 것 이게 이제 좋은 삶의 어떤 모델이라고 제시가 되고 있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일을 한다라고 하는 차원이 지금까지의 개념하고는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 하는 것이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며 헌신하는 것이 일의 주요한 내용이 될 시대가 온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기쁨의 두 가지 형태를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혼자만의 기쁨이 있을 수 있겠고요 이것도 상당히 보탬이 되는 그런 그 기쁨의 내용이지요. 그런데 혼자만의 기쁨을 넘어서는 함께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 혼자만의 기쁨은 함께하는 기쁨에 비할 때가 못 되죠. 그러니까 우리들이 혼자만의 기쁨을 넘어서서 함께하는 기쁨을 누려야 되는 것인데 이게 AI와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이 시대적인 전환기에 그러므로 학교는 뭘 가르칠 수 있겠느냐 만약게 중심적인 그런 과제입니다. 함께하는 기쁨을 배워야 되고 그걸 넘어서서 사랑하는 법부터 배우는 것 이게 학교가 앞으로 교육의 내용으로 방법으로 지향을 해야 될 아주 중요한 관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학교가 경쟁을 가르치고 비교 우위를 가르치고 누가 더 뛰어나냐 하는 것을 가르치고 또 뛰어난 학생들을 위주로 하는 그런 교육 체계나 방법이 아니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도록 가르치는 것, 사랑하는 내용과 방법을 가르치는 학교가 돼야 된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관점이 뭐 놀랍다기보담도 앞으로 뭐 우리 생활 전반이 상당한 변화를 겪을 터인데 학교가 필요하냐라고 하는 질문으로부터 필요하다면 앞으로 학교는 또 공부하는 공간 스콜레는 무엇을 지향하는 장소가 돼야 되고 그걸 또 그런 관점으로 변화가 돼야 되겠느냐 하는 것을 생각을 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제가 그런 차원에서 오늘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말씀을 좀 들려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은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린 긴 기도의 내용이 수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요한복음 17장 21절을 읽어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인데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어떤 내용이냐 하는 것을 아주 잘 드러내 주고 있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믿고 알게 해 달라고 하는 그런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도 다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과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해 달라고 하는 그런 기도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린 내용이 요한복음 17장에 들어 있습니다. 여기 보면은 하나님과 예수님은 완벽하게 한 분으로 결속되어 계신 분이라고 하는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그 초대교회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아들로 더 나가서 하나님의 외아들로 그러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하는 위대한 신앙 고백을 따라서 교회 생활과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 교인들은 이런 예수님의 이런 기도의 내용도 있지만은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은 무엇을 근거로 예수님과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즉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질상 같은 분이라고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같은 책인 요한복음 17장에 따르면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한 분이라고 하는 말씀의 근거가 나와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체험한 내용이지만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체험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근거로 예수님과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본질상 같은 분이라고 요한복음 17장 24절에 보면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셨다고 하는 말씀이 그래서 반복되어져서 나오고 있습니다. 24절을 들어보면은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심으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나를 사랑하심으로, 또 그 전절인 23절에도 보면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나를 사랑하심 같이" 또 26절에도 보면은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이런 표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의 내용은 온통 하나님의 사랑과 직결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을 요한복음 17장에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을 통해서 충분히 찾아볼 수가 있겠습니다. ​물론 비교해 보자면 유대교의 가르침들 속에서도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다수입니다. 그런데 유대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께서 복음의 내용으로 선포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관계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입니다. 유대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요 어떤 사랑이냐 하면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베풀어지는 사랑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대교는 율법을 생명처럼 여기는 종교 아닙니까?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만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라고 가르쳤다는 거죠. 그러니까 매우 선택적이고 제한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고 언급하는 종교가 유대 교회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얘기는 해요. 이처럼 유대인들의 율법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유대인들만 선택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이라고 하는 제한적이고 선택적이지만은 예수님께서 체험하시고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제한적이지도 않고 선택적이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세리와 죄인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상징되는 집안의 아버지를 속이고 재산을 탕진해 버린 탕자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셨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언급을 할 때에 햇볕도 비도 착한 사람들에게만 비춰지고 내리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들에게도 햇빛도 쬐고 비도 내린다라는 것으로 설명을 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생활을 하시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으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율법이라든지 기준으로 제한하는 세력이 있으면 강력하게 저항하셨습니다. 그게 아니라고요. ​그러면서 요한복음 17장 24절은 또 다른 말씀으로 연결이 되는데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고 하는 사실이 곧 예수님의 영광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영광스러운 분으로 우리가 신앙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 영광의 근거가 뭐냐,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이 가지신 영광이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차별 없고 또 구별하지 아니한 제한적이지 아니한 이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영광의 토대가 되었다라고 하는 그 말씀입니다. 이렇듯이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하나신 이유, 예수님과 하나님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깊은 체험을 했던 인물이 있으니 예수님 말고 신약 성경에 나오고 있는 인물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저는 오늘 로마서 5장 말씀을 통해서 그러한 신앙적인 관점을 가지고 한번 조명을 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신약 성경에 많은 편지를 남겨 놓고 또 복음에 근거한 사랑의 말씀을 남겨 놓은 바울의 일생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행복한 가정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고 난 뒤에 복음을 전하다가 죽을 고생을 밥 먹듯이 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로마 근교에서 참수형으로 순교까지 당하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실질적으로 보면요 이제 복음을 위해서 바울이 활동을 하는데 복음의 근거에서 탄생이 된 이 역사 가운데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있지 않습니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뭐라면 예수님이 뽑아세운 제자들이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바로이 지도자들에게도 바울은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실상을 보면은 바울은 뛰어난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교육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철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에 비해서 조금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 높은 신앙과 철학과 교육의 봉우리에 올라선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인정받지를 못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유대교에 철저했던 율법에 철저했던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바울이 되어서 복음을 전하게 되니까 그리고 외형적으로 보면 율법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고 할례를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고 기존에 유대교회 질서를 허물어뜨리는 것처럼 보이는 바울이었기 때문에 유대교 자체도 또 유대교에 속한 종교 지도자들도 이 바울을 배신자로 낙인을 찍고 부지기 괴롭혔습니다. 회당 있는 곳마다 들어가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그 회당에서 쫓겨나기를 수없이 당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로마서 5장 말씀을 보니까 사도 바울은 이러한 안팎의 시련을 외면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받아들인 배포가 큰 신앙인이라고 하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아무리 주변에서 떠들고 배격을 하고 죽이려고 해도 결코 주눅들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들을 영적인 합리성에 근거해서 오늘도 우리에게 신앙 고백을 합니다. 3절, 4절 내용이에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참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어떻게 환난과 근심과 재난 중에도 즐거워하고 그것을 자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같은 범인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들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질색을 하는 환난마저도 자랑하는 그런 신앙인이 된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환난이 결국에는 희망의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을 남겨 놓았습니다. ​저는이 바울이 환난으로부터 시작해 가지고 인내와 연단을 거쳐 가지고 희망에 이른다고 하는 이 고백을 좀 더 실질적으로 생각해 볼 수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말 성경에 보면은 환난과 인내와 연단과 희망이라고 하는 단어가 나열이 되고 있는데 그중에 연단이라고 번역이 된 그리스말 헬라어가 '도키미'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은 바울은 이 환난과 연단과 희망을 가지는 신앙인이 돼 가지고 입증된 인격자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도키미, 입증이 된 인물이다, 입증이 된 신앙인이고 입증이 된 사도라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증명이 된 사람이라 그런 뜻입니다. 독일어 성경에선 그래서 증명이라는 말을 연단이라는 말을 대신해서 사용을 합니다. 공동번역 성경에도 보면 이 연단을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라고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은 사도 바울은요 외유내강, 또 그걸 넘어서서 내공이 아주 강한 사람이라고 표현해도 틀리지 않겠습니다. 이처럼 환난과 인내와 연단을 거쳐서 희망에 이른 사도 바울의 삶의 내공이 깊어지게 되면은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희로애락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사명, 삶의 본질에만 천착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의 입증된 신앙 인격이라고 표현해도 틀리지 않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희망을 우리 범인들이 품고 살기라는 건 쉽지 않은 것 잠시 이러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가도 순간적으로 분노와 서운함과 불평과 걱정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세상의 영광에 목말라 하는 그런 행태가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바울은 5절에서 이 인생들의 문제를 정확하게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뭐라고 했느냐,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우리의 희망은 우리를 부끄러움에 떨어지지 않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뭐가 문제냐 하는 겁니다. 희망의 사람이었다가 금방 절망의 사람이 되는 이유가 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다가도 금세 돌아서서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이유가 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게 원인이라 바울이 지적한 내용입니다. 물론 그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말하고 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에요. 단서를 붙이기를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채워지는 것인데 왜 자꾸 희망을 거어차하고 절망 가운데 사는지, 왜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지, 그것은 성령의 역에 의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없기 때문에 그렇다, 이게 바울의 신앙 논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그런 신앙의 삶이 이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사랑 그 자체이신 그 사랑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채워져야 되는데 우리로서는 그게 되지 않습니다.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러니까 오늘 로마서 5장 1절 이하에 보면은 죄인된 우리를 믿음으로만 구원하시고 의롭다고 인정받게 하셨다 하는 단계가 반드시 필요한 거예요. 성령의 역사로 우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채워지려고 한다면 먼저 회개하고 믿음을 갖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그 과정이 꼭 필요하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5장 1절부터 그 내용을 붙여 놓았다고 말씀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인생의 삶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능력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마치 땅속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일상을 살아갈 수가 있는 거예요. 남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상관없이 내가 처하는 삶의 조건에 지배당하지 않고 삶의 기쁨을 충만하게 받아들일 수가 있는 거죠. 이런 삶야말로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팔복이 말하고 있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에 여러분들의 영혼의 촉수를 분명하게 기울이면서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을 이것을 늘 붙들고 여러분의 일상의 삶을 주님에 대한 사랑을, 주님의 몸인 교회에 대한 사랑을, 그리고 최종적으로 세상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처럼 여러분들의 말과 생각과 삶을 통해서 드러내야 되겠습니다. 이게 수행적인 삶입니다. 우리 청주제일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러한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해져서 세상까지 사랑할 줄 아는 신실하고 수준 높은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이 쏟아부어진 상태의 삶입니다. 이것을 알고 깨닫고 살아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쏟아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늘 깨닫고 그 사랑이 충만해서 세상도 사랑하며 이웃도 사랑하며 하나님의 피조 세계 모두를 사랑하며 살아가기로 다짐하는 이 자리에 함께한 모든 성도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김성회장로 2026-10-11 10:57:05
로마서 5장 1절부터 8절까지 말씀을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죄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멘. 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제 말씀을 받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통해 하늘 문이 열리는 놀라운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올해 1월 달의 다보스 포럼, 즉 세계 경제 포럼 모임에서 테슬라 최고 경영자인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일론 머스크가 이런 말을 한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 일반적인 인공지능 시대를 넘어서서 이제는 초인공지능에 의해서 운영이 되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인간의 수를 앞지를 것이고 또 이들이 인간들의 노동을 대체할 것이고 그리고는 지속 가능한 풍요의 시대가 올 것이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뭐 다른 이야기들은 다 빼놓고요. 이 초인공지능에 의해서 움직이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그러지면 인간들이 그동안에 땀 흘리고 애써왔던 노동을 대체할 것이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또 반면에 이제 이게 몇 년 뒤인데요, 2030년 때부터는 이 초인공지능 시대가 인류의 멸망을 이끄는 때가 될 것이다라고 하는 부정적인 예측도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러한 시대적인 전환기에서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이 어떻게 정립이 될 수 있겠는가, 구체적으로 학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보통 학교 생활도 잘하고 또 좋은 대학을 가든 대학 생활을 마치고 좋은 직장을 구하고 수입을 얻고 가정을 꾸리고 하는 것이 뭐 소소하지만 가장 일반적인 우리들의 바람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기초를 이루고 있는 학교에서 모든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들의 노동을 대신한다면 돈 벌기 위해서 노동하기 위해서 공부하고 배웠던 그 학교가 앞으로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어쩌면 이것이 21세기의 학교 교육의 핵심적인 질문이 될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학교 그러면 영어 단어로 '스쿨'이라고 하는 단어를 금방 떠올리지 않습니까? 근데 이 스쿨이라고 하는 단어는 그냥 생긴게 아니고 헬라어로 부터 유래가 되었는데요. '스콜레'라고 하는 헬라어로 부터 유래가 된 단어가 영어의 스쿨, 학교입니다. 이 스콜레라고 하는 이 말이 처음에는 어떤 용도로 사용이 되어졌느냐 하면은 노동, 일에서 벗어난 시간 즉 여가의 시간을 가르칠 때에 스콜레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을 하지 아니하는 여가의 시간이 늘어나다 보니까 이 여가의 시간에도 무엇을 좀 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그런 판단들을 하게 되었고 그 여가의 시간에 학문적인 토론을 이루고 또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 그런 강의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가르치게 됐다 하는 것입니다. 그 스콜레라고 하는 헬라어가 처음에는 여가 시간을 의미했는데 그 여가 시간을 이용해 가지고 학문적인 토론을 행하고 또 강의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가르치는 용어가 됐다는 것이죠. 추상적인 개념으로부터 구체적인 한 장소를 가르치는 용어가 되어서 이 스콜레가 지금의 스쿨이라고 하는 영어 단어를 탄생시켰다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당시의 헬라 시대 때에 스콜레에서 이런 그 일들을 참여하고 또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대개가 또 배움의 기회가 대개는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졌느냐 하면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자유민 남성들에게만 이런 배움의 기회가 주어졌던 것으로 알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이 사라지고 노동이 사라지는 시대가 올 것 같아요. 지금 우리 인류가 지금 상당한 혼란 속에 있기는 한데 그럴 때 그럼 우리는 뭘 할 거냐 하는 거죠. 땀 흘리고 일하는 것이 사라져 버리면 초인공지능의 로봇이 모든 것을 대행을 한다면 뭘 할 수 있을까, 그 학교 교육도 더 이상 돈 벌기 위해서 또는 직업에 필요한 지능이나 지식이나 기술을 학습하고 훈련하는데 머물지 않고 뭘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그런 질문이 가능하다라는 것이죠. 좋은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근데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인간들의 좋은 삶은 세 가지로 구성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첫 번째가 놀이를 통해서 우리 삶에서 기쁨을 경험하는 법을 배운다, 놀이를 통해서 기쁨을 누리는 법을 배운다 이게 좋은 삶의 첫 번째 내용입니다. 두 번째는 놀이를 통해서 배운 기쁨의 노하우를 나 혼자만 누리는 것이 아니고 가족이나 동료나 연인이나 또는 이웃이나 반려자와의 관계 적용함으로써 사랑의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 하는 게 두 번째 단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놀이, 사랑, 그리고 일을 우리의 인생의 삶 속에서 통합해내는 것 이게 이제 좋은 삶의 어떤 모델이라고 제시가 되고 있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일을 한다라고 하는 차원이 지금까지의 개념하고는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 하는 것이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며 헌신하는 것이 일의 주요한 내용이 될 시대가 온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기쁨의 두 가지 형태를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혼자만의 기쁨이 있을 수 있겠고요 이것도 상당히 보탬이 되는 그런 그 기쁨의 내용이지요. 그런데 혼자만의 기쁨을 넘어서는 함께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 혼자만의 기쁨은 함께하는 기쁨에 비할 때가 못 되죠. 그러니까 우리들이 혼자만의 기쁨을 넘어서서 함께하는 기쁨을 누려야 되는 것인데 이게 AI와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이 시대적인 전환기에 그러므로 학교는 뭘 가르칠 수 있겠느냐 만약게 중심적인 그런 과제입니다. 함께하는 기쁨을 배워야 되고 그걸 넘어서서 사랑하는 법부터 배우는 것 이게 학교가 앞으로 교육의 내용으로 방법으로 지향을 해야 될 아주 중요한 관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학교가 경쟁을 가르치고 비교 우위를 가르치고 누가 더 뛰어나냐 하는 것을 가르치고 또 뛰어난 학생들을 위주로 하는 그런 교육 체계나 방법이 아니라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도록 가르치는 것, 사랑하는 내용과 방법을 가르치는 학교가 돼야 된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관점이 뭐 놀랍다기보담도 앞으로 뭐 우리 생활 전반이 상당한 변화를 겪을 터인데 학교가 필요하냐라고 하는 질문으로부터 필요하다면 앞으로 학교는 또 공부하는 공간 스콜레는 무엇을 지향하는 장소가 돼야 되고 그걸 또 그런 관점으로 변화가 돼야 되겠느냐 하는 것을 생각을 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제가 그런 차원에서 오늘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말씀을 좀 들려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은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린 긴 기도의 내용이 수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요한복음 17장 21절을 읽어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인데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어떤 내용이냐 하는 것을 아주 잘 드러내 주고 있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믿고 알게 해 달라고 하는 그런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사람들도 다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과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해 달라고 하는 그런 기도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린 내용이 요한복음 17장에 들어 있습니다. 여기 보면은 하나님과 예수님은 완벽하게 한 분으로 결속되어 계신 분이라고 하는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그 초대교회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을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아들로 더 나가서 하나님의 외아들로 그러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은 한 분이시다라고 하는 위대한 신앙 고백을 따라서 교회 생활과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 교인들은 이런 예수님의 이런 기도의 내용도 있지만은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은 무엇을 근거로 예수님과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즉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질상 같은 분이라고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같은 책인 요한복음 17장에 따르면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한 분이라고 하는 말씀의 근거가 나와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체험한 내용이지만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체험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근거로 예수님과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본질상 같은 분이라고 요한복음 17장 24절에 보면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셨다고 하는 말씀이 그래서 반복되어져서 나오고 있습니다. 24절을 들어보면은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심으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나를 사랑하심으로, 또 그 전절인 23절에도 보면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나를 사랑하심 같이" 또 26절에도 보면은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이런 표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의 내용은 온통 하나님의 사랑과 직결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을 요한복음 17장에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을 통해서 충분히 찾아볼 수가 있겠습니다. ​물론 비교해 보자면 유대교의 가르침들 속에서도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다수입니다. 그런데 유대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께서 복음의 내용으로 선포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관계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입니다. 유대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요 어떤 사랑이냐 하면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베풀어지는 사랑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대교는 율법을 생명처럼 여기는 종교 아닙니까?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만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라고 가르쳤다는 거죠. 그러니까 매우 선택적이고 제한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고 언급하는 종교가 유대 교회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얘기는 해요. 이처럼 유대인들의 율법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유대인들만 선택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이라고 하는 제한적이고 선택적이지만은 예수님께서 체험하시고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제한적이지도 않고 선택적이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세리와 죄인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상징되는 집안의 아버지를 속이고 재산을 탕진해 버린 탕자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셨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언급을 할 때에 햇볕도 비도 착한 사람들에게만 비춰지고 내리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들에게도 햇빛도 쬐고 비도 내린다라는 것으로 설명을 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생활을 하시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으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율법이라든지 기준으로 제한하는 세력이 있으면 강력하게 저항하셨습니다. 그게 아니라고요. ​그러면서 요한복음 17장 24절은 또 다른 말씀으로 연결이 되는데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고 하는 사실이 곧 예수님의 영광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영광스러운 분으로 우리가 신앙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 영광의 근거가 뭐냐,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이 가지신 영광이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차별 없고 또 구별하지 아니한 제한적이지 아니한 이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영광의 토대가 되었다라고 하는 그 말씀입니다. 이렇듯이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하나신 이유, 예수님과 하나님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깊은 체험을 했던 인물이 있으니 예수님 말고 신약 성경에 나오고 있는 인물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저는 오늘 로마서 5장 말씀을 통해서 그러한 신앙적인 관점을 가지고 한번 조명을 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신약 성경에 많은 편지를 남겨 놓고 또 복음에 근거한 사랑의 말씀을 남겨 놓은 바울의 일생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행복한 가정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고 난 뒤에 복음을 전하다가 죽을 고생을 밥 먹듯이 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로마 근교에서 참수형으로 순교까지 당하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실질적으로 보면요 이제 복음을 위해서 바울이 활동을 하는데 복음의 근거에서 탄생이 된 이 역사 가운데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있지 않습니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뭐라면 예수님이 뽑아세운 제자들이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바로이 지도자들에게도 바울은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실상을 보면은 바울은 뛰어난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교육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철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에 비해서 조금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 높은 신앙과 철학과 교육의 봉우리에 올라선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인정받지를 못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유대교에 철저했던 율법에 철저했던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바울이 되어서 복음을 전하게 되니까 그리고 외형적으로 보면 율법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고 할례를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고 기존에 유대교회 질서를 허물어뜨리는 것처럼 보이는 바울이었기 때문에 유대교 자체도 또 유대교에 속한 종교 지도자들도 이 바울을 배신자로 낙인을 찍고 부지기 괴롭혔습니다. 회당 있는 곳마다 들어가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그 회당에서 쫓겨나기를 수없이 당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로마서 5장 말씀을 보니까 사도 바울은 이러한 안팎의 시련을 외면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받아들인 배포가 큰 신앙인이라고 하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아무리 주변에서 떠들고 배격을 하고 죽이려고 해도 결코 주눅들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들을 영적인 합리성에 근거해서 오늘도 우리에게 신앙 고백을 합니다. 3절, 4절 내용이에요.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참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어떻게 환난과 근심과 재난 중에도 즐거워하고 그것을 자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같은 범인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들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질색을 하는 환난마저도 자랑하는 그런 신앙인이 된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환난이 결국에는 희망의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을 남겨 놓았습니다. ​저는이 바울이 환난으로부터 시작해 가지고 인내와 연단을 거쳐 가지고 희망에 이른다고 하는 이 고백을 좀 더 실질적으로 생각해 볼 수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말 성경에 보면은 환난과 인내와 연단과 희망이라고 하는 단어가 나열이 되고 있는데 그중에 연단이라고 번역이 된 그리스말 헬라어가 '도키미'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은 바울은 이 환난과 연단과 희망을 가지는 신앙인이 돼 가지고 입증된 인격자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도키미, 입증이 된 인물이다, 입증이 된 신앙인이고 입증이 된 사도라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증명이 된 사람이라 그런 뜻입니다. 독일어 성경에선 그래서 증명이라는 말을 연단이라는 말을 대신해서 사용을 합니다. 공동번역 성경에도 보면 이 연단을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라고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은 사도 바울은요 외유내강, 또 그걸 넘어서서 내공이 아주 강한 사람이라고 표현해도 틀리지 않겠습니다. 이처럼 환난과 인내와 연단을 거쳐서 희망에 이른 사도 바울의 삶의 내공이 깊어지게 되면은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희로애락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사명, 삶의 본질에만 천착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의 입증된 신앙 인격이라고 표현해도 틀리지 않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희망을 우리 범인들이 품고 살기라는 건 쉽지 않은 것 잠시 이러한 희망을 가지고 있다가도 순간적으로 분노와 서운함과 불평과 걱정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세상의 영광에 목말라 하는 그런 행태가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바울은 5절에서 이 인생들의 문제를 정확하게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뭐라고 했느냐,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우리의 희망은 우리를 부끄러움에 떨어지지 않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뭐가 문제냐 하는 겁니다. 희망의 사람이었다가 금방 절망의 사람이 되는 이유가 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다가도 금세 돌아서서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이유가 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게 원인이라 바울이 지적한 내용입니다. 물론 그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말하고 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에요. 단서를 붙이기를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채워지는 것인데 왜 자꾸 희망을 거어차하고 절망 가운데 사는지, 왜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지, 그것은 성령의 역에 의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없기 때문에 그렇다, 이게 바울의 신앙 논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그런 신앙의 삶이 이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사랑 그 자체이신 그 사랑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채워져야 되는데 우리로서는 그게 되지 않습니다.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러니까 오늘 로마서 5장 1절 이하에 보면은 죄인된 우리를 믿음으로만 구원하시고 의롭다고 인정받게 하셨다 하는 단계가 반드시 필요한 거예요. 성령의 역사로 우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채워지려고 한다면 먼저 회개하고 믿음을 갖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그 과정이 꼭 필요하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5장 1절부터 그 내용을 붙여 놓았다고 말씀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인생의 삶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능력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마치 땅속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일상을 살아갈 수가 있는 거예요. 남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상관없이 내가 처하는 삶의 조건에 지배당하지 않고 삶의 기쁨을 충만하게 받아들일 수가 있는 거죠. 이런 삶야말로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팔복이 말하고 있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에 여러분들의 영혼의 촉수를 분명하게 기울이면서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을 이것을 늘 붙들고 여러분의 일상의 삶을 주님에 대한 사랑을, 주님의 몸인 교회에 대한 사랑을, 그리고 최종적으로 세상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처럼 여러분들의 말과 생각과 삶을 통해서 드러내야 되겠습니다. 이게 수행적인 삶입니다. 우리 청주제일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러한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해져서 세상까지 사랑할 줄 아는 신실하고 수준 높은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이 쏟아부어진 상태의 삶입니다. 이것을 알고 깨닫고 살아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쏟아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늘 깨닫고 그 사랑이 충만해서 세상도 사랑하며 이웃도 사랑하며 하나님의 피조 세계 모두를 사랑하며 살아가기로 다짐하는 이 자리에 함께한 모든 성도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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